애국으로행복

[스크랩] 백두산 정상에서의 쪽바리들...

good해월 2007. 1. 30. 19:15






▲ 백두산 천지에서 제를 지내는 일본인

‘한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쇠말뚝을 박고, 그 앞에 마련한 제단에서 무속인을 포함한 일본인들이 천황(텐노)의 시조신이자 일본인의 조상신으로 알려진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다.(1943)



▲ 일장기 들고 만세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 천지 앞에서 일장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일본군인(1943)



▲ 백두산 정상에서 합장하는 일본인들

일장기를 든 일본인들이 백두산 정상에서 전쟁승리를 기원하며 합장을 하고 있다.(1943)



▲ 전승기원 만세삼창

백두산에서 노래를 부른 뒤 전쟁 승리를 기원하는 만세삼창을 하고 있는 일본인들(1943)



▲ 혜산진에서 출발해 신사참배를 마치고 백두산 정상을 향하고 있는 대원들. 곧추세운 일장기의 모습이 보인다.

백두산 쇠말뚝 사진 첫 공개 동영상 보러가기

일제, 독립군 묘지에도 쇠말뚝동영상 보러가기



"천지(天池)라 일컬었음이 우연 아니다"

[조선일보 2005-07-19 03:03:52]



최남선, ‘백두산근참기’ 동아일보에 연재 조선일보, 동물학자 등 34명 최대 탐험단
[조선일보 이한수 기자]

■일제시대 백두산 기행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발원지이자 정신적 고향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최초의 백두산 기행문은 1764년(영조 40년) 함경도의 실학파 선비 박종(朴琮)의 ‘백두산유록(白頭山遊錄)’으로 알려져 있다. 한문으로 된 이 기행문에는 이보다 20년 앞서 홍계희(洪啓禧)가 어명을 받들어 백두산을 편람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일제시대 백두산 기행은 주로 조선·동아일보 등 민간 신문사의 주도로 이뤄졌다. 1926년에는 최남선이 조선교육회 주관으로 백두산에 오른 뒤 유명한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썼다. 최남선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이 글에서 “천지(天池)라고 일컬었음이 과연 우연이 아니다. 천(天) 아니시고야 누가 저 조화를 마음대로 부릴 것이냐”고 웅건한 필치로 나라사랑의 마음을 토로했다.

1936년 8월 조선일보가 기획한 ‘백두산 탐험’은 일제시대 최대 규모의 백두산 등반이었다. 김병하(동물학자), 장형두(식물학자), 사공환(역사학자) 등 전문가 단원을 포함 34명으로 구성된 탐험단은 백두산의 전설을 수집하고 곤충 400여점, 식물 2000여점의 표본을 채집했고, 탐험단장 서춘 조선일보 주필은 8월 23일부터 34회에 걸쳐 ‘백두산 탐험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천지에 오른 사회부장 이상호는 “백두 정상에는 눈이 한치 이상이나 와 쌓여 성지의 경치는 무어라고 형언할 수 없이 웅혼장엄하다”고 전했다. 훈련된 비둘기에 매어 날려보낸 이 기사는 130㎞ 떨어진 함북 무산에 도착해 주재기자를 통해 서울로 송고됐다.

조선일보는 “백두(白頭)의 성산(聖山)! 조선인으로서 누가 이를 숭앙(崇仰)치 아니할 자 있으며 장백(長白)의 영봉(靈峰)! 백의인(白衣人)으로서 누가 이를 경모(敬慕)치 아니할 자 있으리오”라고 보도했다.

(이한수기자 hslee@chosun.com )





규장각 비번사印 방안지도의 열람 캡처

http://e-kyujanggak.snu.ac.kr/index.jsp - 규장각 바로가기



출처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글쓴이 : 크레믈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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