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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받아낸 해미 자리개돌

good해월 2008. 3. 6. 10:02

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받아낸 해미 자리개돌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소재한 사적 제116호 해미읍성은 조선조 태종18년인 1418년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성으로 축조하여, 세종3년(1421)부터는 충청도 육군의 본영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유서 깊은 성이다,


이 해미읍성은 순교지로도 유명한데 고종 3년인 1866년에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교도를 천여 명이나 사형시켰던 아픔의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의 흐름은 사람들을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제는 해미읍성을 찾는 사람들도 그 아픔의 현장을 찾아보기 보다는, 그저 성곽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수령 300년 이상이 된 회화나무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순교지를 찾아 순례에 나선 사람들뿐이다.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이 나무에는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 아픔의 나무는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다.

이 회화나무는 충청도 사투리로 ‘호야나무’라고 부른다. 1790년부터 1880년대 까지 천주교도들을 이곳으로 끌고 와, 동쪽가지에 매달아 고문을 하였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나무로 보아지는 이 회화나무는, 고문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동쪽가지는 1940년에 부러져 나갔다. 가운데 줄기 역시 1969년 6월 26일에 폭풍으로 인해 부러졌던 것을, 1975년부터 천주교 측에 의해서 보호가 되기 시작하였다.


이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던 천주교도들은 마지막으로 형을 집행하러 나가는 길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풍습에는 부정한 것을 성 밖으로 내다버릴 때는 반드시 서문을 통해서 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도 서문을 통해 성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이 성을 나가는 곳에는 천주교의 성물을 놓아두고, 배교를 상징하는 행위를 하라고 강요당했다. 그러나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참았던 천주교도들이 어찌 성물에 대해 배교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성문을 통해서 밖으로 끌려나가는 천주교도들은 성물에 대해 배교행위를 강요당했다.

성문 밖으로 끌려 나간 교도들은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1790년부터 1880년까지 이곳에서는 2천여 명의 교도들이 처형을 당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을 사형시키는 방법은 돌 위에 메어치는 방법과 참수 및 교수, 그리고 한겨울에는 얼려서 죽이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고 하니, 형을 당할 때 천주교도들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해미읍성은 참으로 한이 깃든 성인가보다. 자리개돌, 왜 이런 명칭을 붙였을까? 성 밖 한편에 보면 자리개돌이라는 돌이 있다. 바로 다리 아래로 메어쳐서 교도들을 죽일 때, 그 아래에 있던 돌이라고 한다. 길이 4,2m, 너비 1,5m, 그리고 두께 30cm인 이 돌이 바로 교도들의 죽임을 감당했던 돌이다. 지금은 성 밖으로 옮겨왔다. 돌 한편에는 십자가를 음각해 놓았다.   

 

자리개돌, 아마 죽임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을까? 다리 밑에 있던 이돌은 다리위에서 내던져진 천주교도들의 머리가 깨져 죽어가는 피의 역사의 현장이었다.

역사의 아픔은 항상 계속되어진다. 어느 시대에나 역사 속에서는 크고, 작은 아픔들이 있다. 그 아픔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말이다. 해미읍성 안과 밖에 있는 회화나무와 자리개돌, 그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몸소 감당했던 나무와 돌은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에 있다.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아픔만을 간직한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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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누리의 취재노트
글쓴이 : 온누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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