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천주교도들의 죽음을 받아낸 해미 자리개돌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에 소재한 사적 제116호 해미읍성은 조선조 태종18년인 1418년에 충청도 병마절도사영성으로 축조하여, 세종3년(1421)부터는 충청도 육군의 본영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유서 깊은 성이다,
이 해미읍성은 순교지로도 유명한데 고종 3년인 1866년에는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교도를 천여 명이나 사형시켰던 아픔의 현장이기도 하다. 역사의 흐름은 사람들을 망각의 늪으로 빠져들게 한다. 이제는 해미읍성을 찾는 사람들도 그 아픔의 현장을 찾아보기 보다는, 그저 성곽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사진을 찍기에 바쁘다. 그러나 성안에 있는 수령 300년 이상이 된 회화나무의 아픔을 아는 사람은 순교지를 찾아 순례에 나선 사람들뿐이다.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이 나무에는 수많은 천주교도들이 가지에 매달려 고문을 당했다. 아픔의 나무는 슬픈 역사의 주인공이다.
이 회화나무에 매달려 고문을 당하던 천주교도들은 마지막으로 형을 집행하러 나가는 길이 있었다. 우리나라의 풍습에는 부정한 것을 성 밖으로 내다버릴 때는 반드시 서문을 통해서 했다. 그래서 천주교도들도 서문을 통해 성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들이 성을 나가는 곳에는 천주교의 성물을 놓아두고, 배교를 상징하는 행위를 하라고 강요당했다. 그러나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참았던 천주교도들이 어찌 성물에 대해 배교행위를 할 수 있었을까?
성문을 통해서 밖으로 끌려나가는 천주교도들은 성물에 대해 배교행위를 강요당했다.
해미읍성은 참으로 한이 깃든 성인가보다. 자리개돌, 왜 이런 명칭을 붙였을까? 성 밖 한편에 보면 자리개돌이라는 돌이 있다. 바로 다리 아래로 메어쳐서 교도들을 죽일 때, 그 아래에 있던 돌이라고 한다. 길이 4,2m, 너비 1,5m, 그리고 두께 30cm인 이 돌이 바로 교도들의 죽임을 감당했던 돌이다. 지금은 성 밖으로 옮겨왔다. 돌 한편에는 십자가를 음각해 놓았다.
자리개돌, 아마 죽임의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은 아니었을까? 다리 밑에 있던 이돌은 다리위에서 내던져진 천주교도들의 머리가 깨져 죽어가는 피의 역사의 현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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