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순 교수의 방하 한생각> 정답을 주는 교육, 물음을 주는 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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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대학에서 강의를 한 지도 30년 세월이 다 되어간다. 그러나 강의를 한다는 것이 아직도 어렵고 두렵다. 강의 주제에 관련된 자료를 충실히 검토하고 깔끔하고 잘 정돈된 강의를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리고 잘 다듬어진 논리로 강의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학생들로부터 ‘실력이 있다’는 평가를 들을 만한 강의를 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물음을 불러일으키고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강의를 하지 못하는 것, 그 점이 늘 숙제로 남아있다. 그래서 강의가 늘 어렵고 두렵다. 정말 강의라는 것이 원맨쇼가 아니라 교육적 의미를 갖는다면, 학생들에게 물음을 일으키고 스스로 생각하게끔 할 수 있어야 한다. 공부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워주는 것, 그것이 교사의 능력이다. 그렇지 않고 교사 자신의 지식체계로 학생들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지식으로 학생들을 세뇌하고 그것에 길들이는 것, 그래서 학생들이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빼앗고 상상력을 죽이는 것, 그것은 교육이 아니다. ‘족집게 교육’을 생명으로 하는 사교육이란 것이 그렇지 않은가? 철저하게 학생들의 자생력을 무너트리고 자생력을 없애는 것이다. 그래야 학원에 더욱 의존하게 만들고 학원에 의존하게 만들어야 학원이 장사가 된다. 자생력이 없는 공부, 스스로 문제를 풀고 스스로 문제에 마주할 수 없는 공부, 여기에 무슨 희망이 있을까? 입시문제는 족집게 교육으로 풀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숱한 인생의 문제, 사회적 문제들 그것을 풀어줄 족집게는 없다. 자기 문제를 대신 풀어줄 자는 없다. 스스로 풀어야 한다. 그러나 교육을 받을수록, 스스로 문제를 마주하고 문제를 풀어갈 힘을 박탈당하는 바에야 무슨 내일이 있을까? 명강사의 강의라는 것도 다를 바 없다. 청중들에게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청중들을 울리고 웃기고 기발한 이야기로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을 줄 수는 있지만 거기에도 생각이 없다. 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 물음을 던지는 것 같지만, 강사 자신의 이론과 지식으로 청중들을 지배하기 때문에, 심할 경우는 청중들을 강사 자신의 신도로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청중들에게 의문의 여지,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명강사는 또 다른 ‘족집게’일 뿐이다. 정말 훌륭한 선생들은, 가령 불교사에 나오는 위대한 조사들은 제자들에게 물음을 주었고 정답을 주지 않았다. 화두를 주었지 화두를 풀어준 적이 없다. 어차피 각자의 문제는 각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문제를 풀고 못 풀고는 자기의 몫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 선생들이 보여준 것은 면벽(面壁)이었다. 백날 천날 마주 앉아도 말 한마디 없는 벽, 무엇하나 가르쳐 주지 않는 벽을 마주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무식한 짓을 가르쳤다. 그들은 유식함을 가르치지 않았다. 벽을 마주하는 무식한 짓을 가르쳤다. 도저히 넘을 수 없고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는, 마치 거대한 장벽과 같은 자신의 문제를 그렇게 마주하라는 것이었다. 벽을 마주하여 버틸 수 있는 무식함, 그것이 문제로부터 도망가지 않을 용기이며 그 무식함에서 끝내 스스로 문제를 풀 수 있는 힘이 나온다는 것을 그렇게 말없이 가르쳤다. 영남대 국사과교수·baeysoon@yumail.ac.kr 기사 게재 일자 2008-09-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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