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벼락 한번 맞아봤으면….”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쯤 해보는 상상이다. 돈에 힘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돈 없는 사람은 입도 없다”는 속담은 가진 것이 없으면 하고 싶은 말도 참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돈만 있으면 ⅩⅩ도 산다”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살 수 있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돈은 쓰기 나름이다. “돈 자랑 Ⅹ자랑은 하지 말랬다”,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 등의 속담은 ‘돈이 많다고, 우쭐대거나 무례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조상들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매일 쓰는 돈은 ‘노동의 대가’이면서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팔 때 주고받는 ‘유통의 수단’이다. 돈은 또 인체의 혈액과 같아서 제대로 잘 돌아야 국가경제가 건강할 수 있다. 이런 돈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재미있는 사실이 많다.
■ 현재 화폐발행 잔액 50조원
국내의 화폐발행 잔액은 지난 5월말 현재 50조5280억원이다. 은행들이 지급을 위해 창고에 보관한 돈(시재금) 10조2611억원과 기업이 투자를 위해 가지고 있는 돈 9조1853억원(3월말 기준)을 뺀, 31조여원이 시중에 나돌고 있다. 인구를 5000만명으로 봤을 때 한사람당 62만원 정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발행된 화폐 중 5만원권이 28조6399억원으로 가장 많다. 장수로 따지면 5억7278만8000장이다. 전체 발행화폐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56.7%로 절반을 넘어섰다.
발행수량으로 보면 1만원권이 가장 많다. 1만원권 발행잔액은 17조3936억원으로 17억3936만장이 유통되고 있다. 시중에 돌고 있는 5000원권은 1조645억원, 1000원권 1조3084억원, 500원권 107억원, 10원권 이하는 27억원 수준이다.
■ 한국 돈에는 ‘2’가 없다
한국의 화폐 종류는 동전 6종(1원, 5원, 10원, 50원, 500원), 지폐 4종(1000원, 5000원, 1만원, 5만원) 등 10가지다. 1950년 한국은행이 설립된 이후 발행한 은행권은 예외 없이 1 또는 5로 시작한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1·5’ 체계를 유지하는 국가다. 2달러와 20달러 지폐가 있는 미국, 5·10·20·50·100·200·500 유로화가 있는 유럽은 ‘1·2·5’ 체계다. 일본도 2000년에 2000엔권을 도입했다. 이 중 1원과 5원짜리는 일반적인 상거래에서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1992년 이후 사실상 발행이 중단됐다.
■ 신사임당 얼굴을 잊어버렸다
5만원권은 발행 장수로 보면 1인당 11장 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유통되는 5만원권은 많지 않다. 10원짜리 동전도 쉽게 볼 수 없다. 5만원권은 누군가의 비자금 은닉수단으로 쓰이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고, 10원짜리 동전은 장롱 밑이나 서랍 속에서 잠자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둘 다 어두운 ‘지하세계’에 잠겨 있는 셈이다.
5만원권 100장 묶음 스무 다발이면 1억원인데 무게는 2㎏이고 높이는 22㎝ 정도다. 007가방에 5만원권을 채우면 3억원이 들어간다. 최근 새누리당 돈 공천 사건의 브로커 조기문씨 집에서 현금 3억원을 담았다는 루이뷔통 가방에 5만원짜리를 넣어보니 공간이 남았다. 장진수 전 총리실 주무관이 민간사찰 은폐 대가로 건네받았다고 주장하는 5000만원 어치 돈다발은 5만원권이 한국은행 발행 띠지(관봉)도 풀지 않은 채 100장씩 10개 묶음으로 돼 있었다. 지난해 4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발견된 110억원 돈 뭉치의 상당수가 5만원권이었고, 서울 여의도 한 물품보관업체가 보관하고 있던 10억원 박스도 5만원권으로 채워져 있었다.
10원짜리 동전 제조원가는 2006년까지 40원 정도였다. 한국은행은 2006년 말 10원짜리 동전의 크기를 줄이고 재질에 알루미늄을 추가했다. 제조원가를 아끼기 위해서였으나 그래도 제조원가는 30원 정도로 액면가의 3배다. 2006년 이전 10원짜리 동전이 구리 65%와 아연 35%로 주조됐는데, 구리값이 오르면서 범죄에 악용되기도 했다. 지난해 경기 양주에 있는 한 공장에 용광로를 설치해 두고 슈퍼마켓과 은행을 누비며 교환한 10원짜리 동전 5억원어치를 녹여 동괴로 만들어 12억원에 판 일당이 경찰에 적발됐다.
동전은 500원짜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조원가가 액면가보다 높다. 6종의 동전 평균 제조단가는 120원이다. 2006년 전만해도 50원 동전은 38원, 100원 동전은 51원 정도로 추산됐지만 니켈 등 재료값이나 운반비가 오르고 돈을 찍어내는 수량도 줄어 제조원가가 액면가를 넘어선 것이다.
■ 1998년산 500원 동전 ‘귀한 몸’
10원짜리는 1966년에 처음 발행됐고, 50원짜리는 72년에 최초로 나왔다. 100원과 500원 동전은 각각 70년, 82년이 최초 발행연도다. 500원 동전은 85·86년을 빼고는 매년 발행됐는데 98년 제조동전의 몸값은 최고 100만원의 가치를 지닌다. 주화를 제조연도별로 수집하는 사람이 많은데, 동전 제조량이 적었던 해의 주화는 시중에서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97년 금융위기 등으로 한국은행 주화 발행량이 대폭 감소해 당시 500원짜리 동전은 1·5·10·50·100원 주화와 함께 6종으로 묶어 단 8000개만 제작됐다. 약 20억개의 500원짜리 동전 중 98년 제조된 동전은 1000개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98년도 500원 동전의 제조수량은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 화폐수명은 비쌀수록 길다
지폐의 평균수명은 1000원권이 40개월, 5000원권이 65개월, 1만원권은 100개월이다. 한국은행에서 처음 발행된 후 시중에서 유통되다가 더이상 사용하기 어려울 만큼 손상돼 한국은행으로 다시 환수될 때까지의 평균 사용가능 기간이다. 2009년 새로 발행된 5만원권의 수명은 이보다 길 가능성이 높다. 지폐의 수명은 향상된 용지 품질, 작아진 규격 등 때문에 계속 늘고 있다. 지폐의 수명이 늘면, 시중에서 새 돈 구하기가 쉽지 않다. 설을 앞두고 한은은 신권을 대량으로 유통시키지만 과거보다 사정이 나빠졌다. 시중은행들을 통해 내주는 신권 교환 원칙이 엄격하기 때문이다. 평소 해당은행이 얼마나 많은 화폐를 가져갔는지, 손상된 지폐를 얼마나 교환해갔는지 등에 따라 차등 배분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부지런을 떨어야 설 연휴 빳빳한 신권으로 세뱃돈을 줄 수 있다.
■ 한때 5000원권에 ‘서양인 율곡’ 들어가
지폐 속에 뭘 넣을지를 놓고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1980년 12월 발행이 중단되기 전까지 통용된 5000원권 지폐에 담겨있던 율곡 이이는 서양인 얼굴이었다. 율곡 선생 초상을 두고 한동안 ‘서양 율곡’이라 했다. 당시에는 기술 부족으로 화폐 원판을 외국에 제작 의뢰했다. 원판은 영국의 토머스 데레루사에서 제작해 들여왔다. 율곡 선생이 서양인 얼굴을 갖게 된 이유다. 1957년 정부는 500환권 지폐를 발행했다. 이 지폐 중앙에는 이승만 당시 대통령의 초상이 있었다. 하지만 돈을 접을 때 얼굴이 접히니 불경하다 해서 1959년에 발행하기 시작한 새로운 500환권에서는 초상이 우측으로 옮겨졌다.
은행권 역사상 비유명 인사를 화폐의 주인공으로 한 적도 있다. 1962년 100환권에 등장한 모자상(母子像)으로 저금통장을 들고 있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면서 저축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기 위해서다. 당시 화폐의 모델이 육영수 여사와 아들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실제 주인공은 조폐공사에 근무했던 여직원과 그 아들로 밝혀졌다. 그러나 이 은행권은 발행된 지 20여일 만에 긴급통화조치로 인해 발급이 중단됐다.
지폐 앞면에는 세종대왕, 율곡 이이, 퇴계 이황, 충무공 이순신 등 선현의 초상이 있다. 뒷면에는 인물과 관련성이 높은 근정전, 경회루, 오죽헌, 도산서원, 현충사 등의 건축 문화재가 등장한다. 당초 1만원권에는 석굴암 여래좌상을 도안 소재로 사용하려 했지만 정부가 특정 종교를 두둔한다고 문제를 제기해 세종대왕 초상으로 바뀌었다. 은행권 인물 초상이 모두 조선시대 이씨 성을 가진 사람 일색이라는 지적이 많다. 이 같은 점을 감안해 5만원권에는 여성인 신사임당, 아직 발행되지 않았지만 10만원권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선정됐다.
■ 지폐가 종이보다 질기고 강한 이유
지폐는 종이돈이 아니다. 100% 순수 면섬유다. 면섬유는 종이보다 질기고 강해 잘 찢어지지 않고, 컬러 복사기나 컬러 프린터를 이용해 만든 가짜 돈은 진짜 돈과 질감이나 상태가 다르다. 섬유를 겹쳐 만들기 때문에 보는 각도에 따라 무늬와 색상이 변하도록 얇은 특수 필름으로 처리한 ‘홀로그램’을 입힌다.
위조 여부는 손으로 만져보고, 기울여보고 빛에 비추어 보면 구별할 수 있다. 5만원권의 그림 없는 부분에 빛을 비추면 신사임당 초상이 보이며 그 아래 오각형 무늬 안의 액면숫자 ‘5’를 확인할 수 있다. 지폐를 기울여보면 보는 각도에 따라 태극, 우리나라 지도, 4괘의 3가지 무늬가 띠의 상·중·하 3곳에 번갈아 나타나고, 그 사이에 세로로 표시된 액면 숫자 ‘50000’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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