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흉탄 고아’… 22세에 퍼스트레이디 역할
朴당선자가 걸어온 길… 대통령 딸에서 정치 입문까지 서울신문 입력 2012.12.20 03:11[서울신문]박근혜 당선자의 당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부녀(父女) 대통령 탄생이라는 기록도 만들었다. 청와대에서 영애(令愛)로 유년기를 보낸 퍼스트레이디 대리는 34년 만에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게 됐다. 박 당선자의 삶과 정치 여정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빼놓을 수 없다. 박 당선자도 자신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끼친 사람으로 부모님을 꼽는다. 그는 1990년 일기에서 "비범하셨던 부모님을 모셨던 것부터가 험난한 내 인생 길을 예고해 주었던 것"이라고 기록했다. 20대에 부모님을 모두 흉탄에 잃은 비운의 삶을 표현한 것이다.
●전차 타고 등교한 대통령의 딸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고 육 여사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 대구 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해 재직 중이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일했다. 박 당선자의 외조부인 육종관은 육 여사가 과거 혼인 경력이 있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육 여사는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딱딱한 군인 이미지와 달리 가족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분", "젊은 시절 아버지는 로맨티스트"라고 회상했다.
육 여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고 할 만큼 신뢰와 애정을 가졌다. 특히 육 여사에 대해서는 단아한 외모와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을 떠올린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의 어린시절 의장 또는 대통령의 자녀라고 해서 특권의식을 갖지 않도록 평범한 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이었다."고 적었다.
박 당선자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어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학점은 4.0 만점에 3.82였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가 사학을 전공하길 바랐으나 박 당선자는 산업 역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전자공학을 택했다. 졸업 직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친 뒤 강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지만 순식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육 여사 장례 6일 만에 퍼스트레이디역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했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자는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영문도 모른 채 귀국길에 올랐다가 가판대에 놓여진 신문 1면에 육 여사의 사진과 '암살'이라는 글자를 보고 "온 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 왔다."고 회상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의 장례식을 치른 지 엿새 만에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참석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청와대에 들어온 민원을 점검하고 영세 기업, 소외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수행했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어 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주고받기도 했다. 1974년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퍼스트레이디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박 당선자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어 가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며 외교적 식견도 넓어졌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을 당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팽팽하게 맞섰으나 박 당선자가 로절린 여사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원활하게 풀어가 '근혜·카터 회담'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육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맏딸인 박 당선자에게 많은 의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려고 너를 두었는가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1974년 11월 일기에서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또다시 비극을 맞았다. 27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접한 박 당선자는 가장 먼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날 밤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직접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박 당선자는 장례를 치른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공개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매진했다. 박 당선자는 이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표현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가 청와대 시절 자신들에게 겸손을 강조한 이유도 신당동에 돌아와서야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권력의 중심부인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이다.
당시 박 당선자가 적은 일기들에는 특히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많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들이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고 배신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반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어차피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1981년 8월), "계속해서 인간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충성을 얘기하고 뭐가 어떻고 말이 많았던 그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은 자리 하나였다."(1989년 1월 17일) 등 박 당선자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 기간도 오래 지속됐다.
박 당선자는 198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는 등 기념사업회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추도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청와대를 떠난 18년의 세월이 은둔, 칩거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 박 당선자는 "쓴웃음이 나온다."면서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 당선자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으로 1980~1990년 사이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박 당선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결국 평범함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마음의 평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며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계기로 박 당선자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뿌리 깊은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을 따라 경제 안정에 주력했고 가까스로 일으켰는데 무너져 내렸다는 허탈함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 당선자의 정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박 당선자는 1952년 2월 2일 대구시 삼덕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맏딸로 태어났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은 대구 주재 육군본부 작전·교육국 작전차장이었고 육 여사는 중등학교 교사 출신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현 구미시 상모동)에서 소작농 박성빈과 부인 백남의의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구미보통학교, 대구 사범학교(현 경북대 사범대학)를 거쳐 만주군관학교 예과와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만주군 소위로 임관하여 중위 때 해방을 맞아 귀국, 국방경비사관학교(현 육군사관학교) 제2기로 임관해 재직 중이었다.
육 여사는 충북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 옥천여중)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일했다. 박 당선자의 외조부인 육종관은 육 여사가 과거 혼인 경력이 있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 전 대통령과 결혼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육 여사는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했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박 전 대통령에 대해 "딱딱한 군인 이미지와 달리 가족에게 더할 수 없이 다정한 분", "젊은 시절 아버지는 로맨티스트"라고 회상했다.
육 여사에 대해서는 "고등학생이 될 무렵부터 내 안에 가장 이상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어머니가 자리 잡았다."고 할 만큼 신뢰와 애정을 가졌다. 특히 육 여사에 대해서는 단아한 외모와 검소하고 겸손한 성품을 떠올린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의 어린시절 의장 또는 대통령의 자녀라고 해서 특권의식을 갖지 않도록 평범한 생활을 강조했다고 한다.
박 당선자는 자서전에서 "대통령의 자식이기 때문에 혜택을 누린 점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내게 청와대 생활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청와대 생활에서 하지 말아야 할 금기사항이 빼곡한 날이었다."고 적었다.
박 당선자는 서울 장충초등학교에 입학해 1964년 졸업했다. 정몽준 새누리당 의원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이 초등학교 동창이다. 이어 성심여자중학교와 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했다. 학점은 4.0 만점에 3.82였다. 육 여사는 박 당선자가 사학을 전공하길 바랐으나 박 당선자는 산업 역군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전자공학을 택했다. 졸업 직후에는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친 뒤 강단에 서는 것이 꿈이었지만 순식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육 여사 장례 6일 만에 퍼스트레이디역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한 육 여사가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해 서거했다. 프랑스에서 유학 중이던 박 당선자는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영문도 모른 채 귀국길에 올랐다가 가판대에 놓여진 신문 1면에 육 여사의 사진과 '암살'이라는 글자를 보고 "온 몸에 수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쇼크를 받았다.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 왔다."고 회상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의 장례식을 치른 지 엿새 만에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에 참석하면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았다. 청와대에 들어온 민원을 점검하고 영세 기업, 소외 계층을 찾아다니며 봉사활동을 했다. 박 전 대통령의 국토시찰이나 산업현장을 수행했고 아침마다 신문을 읽어 주며 주요 현안에 대한 입장을 주고받기도 했다. 1974년부터 걸스카우트 명예총재를 맡고 새마을운동의 일환인 새마음운동을 전개하며 퍼스트레이디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박 당선자는 "퍼스트레이디로서의 삶은 누에고치에서 깨어나 나비가 되어 가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외국 귀빈들을 접대하며 외교적 식견도 넓어졌다. 1979년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 내외가 방한했을 당시 주한 미군 철수 문제로 팽팽하게 맞섰으나 박 당선자가 로절린 여사와 대화를 나누며 상황을 원활하게 풀어가 '근혜·카터 회담'이라는 별칭도 얻었다.
육 여사를 잃은 박 전 대통령은 맏딸인 박 당선자에게 많은 의지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어느 날 아침 식사를 마친 박 전 대통령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며 "근혜가 없으면 못 살 것 같아. 네 어머니가 그렇게 일찍 돌아가려고 너를 두었는가 봐."라고 말하기도 했다. 박 당선자는 1974년 11월 일기에서 "지금 나의 가장 큰 의무는 아버지로 하여금, 그리고 국민으로 하여금 아버지는 외롭지 않으시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마저 갑작스럽게 서거하면서 또다시 비극을 맞았다. 27일 새벽 박 전 대통령의 소식을 접한 박 당선자는 가장 먼저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그날 밤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고 기록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의 피 묻은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직접 빨면서 평생 흘릴 눈물을 다 흘렸다고 한다.
●평범한 일상을 꿈꾸며
박 당선자는 장례를 치른 뒤 청와대를 떠나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공개되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여행을 다니기도 하고 1980년대 후반에는 박 전 대통령 기념사업에 매진했다. 박 당선자는 이 기간을 "외롭고 긴 항해"라고 표현했다.
박 당선자는 육 여사가 청와대 시절 자신들에게 겸손을 강조한 이유도 신당동에 돌아와서야 절실하게 느꼈다고 회고했다. "권력의 중심부인 청와대라는 공간에서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는 것이다.
당시 박 당선자가 적은 일기들에는 특히 사람들의 배신에 대한 언급이 많다. 청와대에 있을 때에는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 한순간에 돌아서는 모습을 보며 느낀 감정들이다. 신뢰를 가장 중시하고 배신에 대해서는 체질적인 반감을 갖게 된 것도 그 당시의 상황이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 아예 처음부터 마음을 달리 먹고 배신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에는 진정으로 충성을 맹세했지만 어차피 약한 인간이기에 차츰 권세와 명예와 돈을 따라 마음을 바꾸는 사람도 있다."(1981년 8월), "계속해서 인간에 대해 실망을 하게 되는 일들이 생긴다. 충성을 얘기하고 뭐가 어떻고 말이 많았던 그도 결국 마음에 있는 것은 자리 하나였다."(1989년 1월 17일) 등 박 당선자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실망을 느끼게 된 기간도 오래 지속됐다.
박 당선자는 1980년대 후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를 바로잡는 등 기념사업회 활동에 주력했다. 특히 1989년 박 전 대통령의 10주기를 맞아 적극적으로 언론 인터뷰를 하고 추도식을 준비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청와대를 떠난 18년의 세월이 은둔, 칩거로 표현되는 것에 대해 박 당선자는 "쓴웃음이 나온다."면서 "그때도 나는 대한민국의 하늘 아래 살고 있었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는 국민의 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박 당선자는 '평범함'을 갈구했다. '평범한 가정에 태어났더라면'이라는 제목으로 1980~1990년 사이 일기를 묶어서 책으로 냈다. 박 당선자는 "인간이 추구하는 행복이란 결국 평범함 속에 있다고 느껴진다."면서 "마음의 평화,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배로 여기는 것이며 가장 누리고 싶은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를 계기로 박 당선자는 1997년 정치에 입문한다. 퍼스트레이디 시절, 뿌리 깊은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라고 강조한 박 전 대통령을 따라 경제 안정에 주력했고 가까스로 일으켰는데 무너져 내렸다는 허탈함과 위기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해 야당 대표를 지내면서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 당선자의 정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박근혜 대통령 당선]‘5060의 힘’… 2030보다 덩치 커지고 응집력도 강했다■ 득표율 분석 동아일보 입력 2012.12.20 03:12[동아일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서울과 호남을 뺀 전 지역에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이겼다. 박 당선인의 승리 요인을 정리하면 크게 세 가지다. 박 당선인은 젊은층이 결집했음에도 낙승했다. 대선 사상 처음 유권자 분포에서 5060세대가 2030세대를 추월한 결과다. 승리의 최대 견인 지역은 충청이었다. 충청은 이번에도 자신들이 지지한 후보를 당선시키며 '표심의 바로미터'임을 입증했다. 박 후보의 '여성 대통령론'은 남성보다 많은 여성 유권자를 투표장으로 이끌었다는 평가다. 투표율이 75.8%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02년 대선(70.8%)때보다 5%포인트나 오르자 박 당선인의 패색이 짙어 보였다. 하지만 박 당선인은 20일 오전 1시 20분 현재(개표율 96.2%) 문 후보와의 격차를 100만 표 이상으로 벌리며 비교적 여유롭게 리드했다. 이는 노 전 대통령과 이회창 후보의 표차(57만 표)보다 더 큰 것이다. 이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유권자의 연령별 분포에 있다. 50대 이상 유권자는 1618만2017명으로 30대 이하 유권자(1547만8199명)보다 70만3818명이 더 많다. 기본 덩치가 더 큰 데다 투표율까지 30대 이하보다 높으니 젊은 세대의 응집력이 힘을 잃게 된 것이다. 이런 유권자 분포가 만들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저출산 고령화에서 비롯됐지만 직접적으로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의 상당수가 50대로 편입됐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40대도 45세 이상은 박 당선인 지지 성향이, 44세 이하는 문 후보 지지 성향이 뚜렷했다. 베이비붐 세대를 전후해 보수 성향이 짙어진다는 얘기다. 이번 대선을 통해 진보좌파 진영은 50대 이상 유권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다가가야 하는 숙제를 안게 됐다. ② 이번에도 충청이 갈랐다 박 당선인은 20일 오전 1시 20분 현재 충청에서 54.4%를 득표해 문 후보(45.1%)를 9.3%포인트 앞섰다. 선거운동 기간 충남에서만 12차례 유세를 벌이며 표 몰이에 나선 효과를 톡톡히 본 셈이다. 수도권에서 박빙의 승부를 벌이는 상황에서 충청에서의 승리는 전체 판세의 무게 추를 움직인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일반적으로 충북은 박 당선인이, 충남은 문 후보가 유리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결과는 충청 전 지역에서의 박 당선인 승리였다. 박 당선인은 문 후보를 충남에서 13.9%포인트, 충북에서 12.9%포인트 앞서 완승을 거뒀다. '세종시를 누가 지켰는지'를 두고 문 후보와 겨뤘지만 세종시에서도 박 당선인은 문 후보를 4.3%포인트 리드했다. 세종시의 지역구 의원은 이해찬 민주당 전 대표다. 박 당선인은 대전에선 0.3%포인트 차로 신승했다. 강원도도 박 당선인의 '효자 지역'이었다. 이 지역에서 박 당선인은 62.0%의 지지를 얻어 문 후보(37.5%)를 24.5%포인트 따돌렸다. 충청과 강원에서 예상 밖 선전으로 박 당선인은 낙승의 발판을 마련했다. ③ 여성 대통령론 먹혔다 동아일보가 지난달 24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박 후보의 여성 대통령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56.6%가 공감한다고 밝혔다. 남성의 공감 비율은 50.4%였던 반면 여성의 공감 비율은 62.7%였다. 여성의 호응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얘기다. 새누리당은 문 후보와 안철수 전 후보의 '새 정치 프레임'에 맞서 '여성 대통령이 곧 쇄신'이라는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파했다. 지상파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 남성에서는 문 후보 49.8%, 박 후보 49.1%로 박빙의 승부를 벌인 반면 여성에서는 박 후보가 51.1%의 지지로 문 후보(47.9%)를 3.2%포인트 앞섰다. 전체 유권자 수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50만여 명 더 많아 '여성 대통령론'이 두 후보의 표차를 벌리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④ 호남에서 첫 두 자릿수 득표 호남에서는 문 후보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박 당선인에게 의미 있는 득표율을 안겨 줬다. 20일 오전 1시 20분 현재 박 당선인은 전북에서 13.2%, 전남에서 10.0%를 득표했다. 지금까지 보수 후보가 호남에서 두 자릿수 득표를 한 예는 없었다. 다만 광주에서 박 당선인의 득표율은 7.8%였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광주 8.6% △전북 9.0% △전남 9.2%를 득표했다. 박 당선인의 호남 득표율은 방송3사의 출구조사 결과보다 더 높았다. "호남 지역은 대면 조사 시 (박 당선인을 찍고도) 다른 말을 할 수 있어 두 후보의 표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는 박 당선인 캠프의 김무성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의 예측이 맞아떨어졌다. 대구와 경북에서 문 후보의 득표율은 각각 19.5%와 18.6%였다.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대구에서 18.7%, 경북에서 21.7%를 득표했다. ⑤ 엇갈린 수도권 표심, 朴이 웃다 '최대 표밭'인 수도권에서도 박 당선인은 선전했다. 20일 오전 1시 20분 현재 박 당선인은 서울에서 문 후보에게 3.6%포인트 뒤졌지만 경기에서 1.2%포인트, 인천에서 3.6%포인트 앞서며 수도권에서 균형을 이뤘다. 많은 전문가는 박 당선인이 수도권에서 문 후보에게 패배하고 그 격차를 부산·울산·경남(PK)에서 메워야 한다고 봤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경기 지역은 도농 복합지역에 고령 유권자가 많다는 점에서, 인천은 노 전 대통령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발언 논란 등 안보 이슈가 부각되면서 박 당선인 쪽으로 기운 것으로 풀이된다. ⑥ 문 후보, PK에서 목표 달성 문 후보는 분패했지만 PK에서 당초 목표치(40% 득표)를 달성하는 성과를 거뒀다. 문 후보는 20일 오전 1시 20분 현재 부산에서 39.8%, 울산에서 39.8%, 경남에서 36.1%를 득표하며 선전했다. 노 전 대통령이 2002년 당시 올린 △부산 29.9% △울산 35.3% △경남 27.1%를 모두 뛰어넘는 득표였다. 하지만 문 후보는 자신의 지역구인 부산 사상에서 절반이 안 되는 43.9%밖에 득표하지 못했다. 이재명·이남희 기자 egija@donga.com |
[18대 대통령 박근혜]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사람들친박계 인사가 1등 공신… 영입·원로 인사들 전후방 포진친박 김무성·최경환·이정현·서병수 등 당선인과 고락 황우여·이한구·서상기·김태환·한선교 등도 한 몫 정몽준·이재오 외곽지원에 한화갑·이회창 막판 도움 한국일보 이동훈기자 입력 2012.12.20 02:35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이들은 당내 친박 그룹과 정책 그룹, 외부영입 그룹, 당내 비박계 출신, 원로그룹, 보좌관 그룹들로 세분해 볼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은 오랜 기간을 함께 하며 의리를 지켜온 사람을 중시하는 용인(用人) 스타일을 보여왔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사람들'의 첫 번째 자리는 누가 뭐래도 2007년 당내 경선 등 산전수전을 함께 해온 당내 친박계 인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 같다. 최경환 의원이나 이정현 공보단장을 비롯해 서병수 당무조정본부장, 유정복 직능본부장, 홍문종 조직본부장, 이혜훈 최고위원, 이학재 윤상현 의원, 이성헌 현기환 전 의원 등이 박 당선인과 고락을 함께 하며 변치 않는 의리를 보여줬다. 유승민 의원의 경우 궤적은 비슷했지만 최근 소원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선대위를 총괄한 김무성 총괄본부장의 경우 친박 핵심에서 '탈박'을 거쳐 다시 친박으로 돌아 온 경우다. 권영세 종합상황실장은 지난 총선 이후 본격적으로 박 당선인을 도우며 친박 핵심으로 부상했다. 새누리당의 원ㆍ투톱으로 박 당선인과 오랜 인연을 쌓아온 황우여 대표와 이한구 원내대표도 대통령 만들기의 1등 공신으로 볼 수 있다. 이밖에 서상기 김태환 한선교 유기준 정갑윤 이진복 의원과 김병호 김영선 허원제 구상찬 전 의원 등 친박계 인사들이 물심양면으로 박 당선인을 도왔다. 박대출 이상일 서용교 의원 등은 지난 총선 이후 새롭게 부상한 '소장'친박계로 분류된다. 당내 친박계가 박 당선인의 오른팔이라면 정책그룹은 왼팔 격이다. 2007년 경선 때부터 박 당선인을 도와온 안종범 강석훈 이종훈 의원을 비롯해 공부 모임 멤버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과 윤병세 서강대 교수,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 최외출 영남대 교수, 김영세 연세대 교수, 정찬우 금융연구원 부원장 등이 정책그룹이다. 이들은 당내 친박계 인사들만큼 얼굴을 잘 드러내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박 당선인도 이들에 대한 신뢰가 깊다고 한다. 박 당선인과의 인연은 비교적 짧지만 이번 대선 승리에 중요한 기여를 해낸 이들도 적지 않다. 우선 그간 비박계로 분류됐던 인사들이'박근혜 대통령'만들기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정몽준 공동선대위원장이 첫 손가락에 꼽힌다. 이재오 의원과 원희룡 나경원 전 의원도 박 후보 지지에 나섰다. 안상수 전 인천시장도 박 당선인의 승리에 일조했다. 권영진 전 의원은 선거전략을 맡았고, 조해진 안형환 박선규 조윤선 정옥임 대변인은 박 당선인의 '입'을 대신했다. 박 당선인은 2007년 경선 패배 직후부터 5년 뒤를 바라보며 다양한 인사들을 곁으로 끌어들였다. 경제민주화 좌표를 잡게 해 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이 대표적이다. 대선을 앞두고 영입한 안대희 정치쇄신특위 위원장도 정치쇄신이란 화두를 놓치지 않게 도와줬다. 김성주 공동선대위원장이나 홍보를 맡았던 변추석 홍보본부장, 조동원 당 홍보본부장은 영입 성공케이스로 평가 받는다. 무엇보다 박 당선인이 국민통합을 내세우면 영입한 민주당 출신인사들의 기여도 컸다.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나 한광옥 국민통합위원회 수석 부위원장, 김경재 기획담당특보 등은 박 당선인이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과거를 털고 통합 이미지를 만드는데 상당한 도움을 줬다. 박 당선인은 국민통합이란 화두를 대선에 제시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호남 출신 인사들에게 공을 들여왔다고 한다. 김지하 시인이나 김중태 통합위원회 부위원장의 도움도 컸다. 보수진영이 박 당선인을 돕기 위해 대거 팔을 걷어 붙인 것도 인상적이다.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대표와 이인제 의원이 새누리당에 입당했고, 박세일 한반도 선진화재단 이사장, 이석연 변호사 등이 지원 사격을 했다. 눈에 띄는 활동은 없었지만 박 당선인 주변에서 병풍 같은 역할을 해 온 원로 그룹의 무게감도 상당하다. 김용환 서청원 최병렬 김기춘 김용갑 당 상임고문과 이병기 여의도연구소 고문 등이 다양한 방법으로 박 후보를 지원해 왔다. 강창희 국회의장도 박 당선인을 도와 온 원로 그룹으로 분류된다. 홍사덕 전 의원은 경선 때까지만 해도 선대위의 중추 역할을 해왔으나 불법 자금 수수 혐의로 기소되면서 한발 물러선 상태다. 박 당선인의 오랜 측근이라면 보좌관 그룹을 빼놓을 수 없다. 이재만 전 보좌관과 안봉근 정호성 전 비서관이다. 이들은 박 당선인의 정치입문부터 함께 해온'식구'같은 존재다. 워낙 핵심 실세로 평가 받다 보니 대선기간 '4대천왕'이라 불리며 입길에 오르기도 했다. 2007년 경선 이래 박 당선인을 도와온 백기승 공보위원, 신동철 여의도연구소 부소장, 조인근 메시지팀장, 장경상 전략기획팀장 등도 박 당선인에겐 역시 식구 같은 사람들이다. 이동훈기자 dhlee@hk.co.kr |
Why뉴스] 문재인은 왜 선택받지 못했나?노컷뉴스 권영철 입력 2012.12.20 10:09
[CBS 권영철 선임기자] 뉴스의 속사정이 궁금하다. 뉴스의 행간을 속 시원히 짚어 줍니다. [Why 뉴스]는 CBS 라디오 < 김현정의 뉴스쇼 > 를 통해 들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18대 대통령선거에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가 전체 투표자의 51.6%에 해당하는 1577만3128표를 획득, 1469만2632표를 얻어 48%의 득표에 그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를 108만496표 차이로 따돌리고 당선됐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 이후 처음으로 과반 득표에 성공한 첫 여성대통령이 된 것이다. 오늘 [Why뉴스]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승리한 박근혜 당선인의 당선 이유는 많은 언론이 분석하고 있으므로 역설적으로 '문재인은 왜 선택받지 못했나?'라는 주제를 정했다. ▶문재인 후보의 낙선 원인을 한마디로 규정할 수 있나? = 문재인 후보의 선거 패배 원인을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선거구도 설정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선거는 '프레임의 전쟁'이라고 하는데 문재인 후보진영이 이 프레임을 짜는데 박근혜 후보 진영에 밀렸다는 얘기다. 이번 선거는 공식적으로는 '박근혜 대 문재인'의 구도였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박정희 대 노무현'의 구도였다. 이 구도는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이어지면서 문재인 후보진영에서 강조한 '과거세력 대 미래세력'의 구도가 먹혀들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박정희 대 노무현'의 구도가 만들어지면서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문재인 후보가 '이명박근혜'를 비판하면서 '정권교체'를 주창했지만 박근혜 후보는 '시대교체'로 맞서면서 이명박 정부 실패론에 참여정부 심판론을 추가한 것이 더 먹혀 든 것이다. 문재인 후보의 패인을 열거하자면 '미진한 단일화', '노년층의 증가', '민주당 내부의 갈등', '안철수에 대한 과도한 기대' 등 숱한 원인들이 있겠지만 이 보다는 '프레임 설정'에서 실패했고, 이로 인해 선거이슈에서도 새누리당에 끌려가면서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 차례도 제대로 역전하지 못했다. '친노 대 비노'의 구도도 문재인 후보에게는 악재로 작용했다. 민주당은 공식선거운동 직전까지 당 내분에 시달렸다. 야권단일화에 치중하면서 당대표가 중도 퇴진해야했고 핵심참모들이 친노책임론에 밀려서 백의종군을 선언해야 했다. 선거막판에 터진 '북한의 장거리 로켓발사'와 '국정원 여직원 사건'도 문재인 후보에게는 악재로 작용했다. 이 사건들이 문재인 후보의 지지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박근혜 지지층의 결집이라는 역풍을 불러온 것이다. 문재인 후보의 한계도 주요 원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문재인 후보가 '비욘드(beyond) 노무현'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면서 '참여정부 실정론'이 먹혀들게 된 요인이 되기도 했다. = 넓은 의미로 보자면 '보수 대 진보'의 대결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 구도가 새누리당이나 보수언론의 의도에 끌려가는 것으로 야당의 패배 원인중 하나로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이번 선거는 지역 대결과 세대 간 대결의 양상을 보였다. 호남지역에서는 문재인 후보가 90%에 육박하는 지지를 받은 반면, 대구·경북지역에서는 박근혜 후보가 80%를 넘는 지지를 받았다. 부산·울산·경남 지역에서 박근혜 후보가 60% 이상의 지지를 획득하면서 문재인 후보가 40%의 벽을 넘지 못했다. 과거의 '3김 시대'로 대표되는 지역 맹주를 중심하는 지역주의는 많이 옅어졌지만 아직도 우리사회에서는 지역 간 두터운 벽이 허물어지지 않았음을 입증한 것이다. 제대로 된 '보수 대 진보'의 대결이 되려면 계층간 계급간 대결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런 구도는 이뤄지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저소득층, 저학력층 일수록 박근혜 후보 지지가 높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설문조사에서도 저소득층일수록 자신을 '보수'로 인식하는 사례가 많다는 점도 이를 반증하는 것이다. '보수 대 진보'의 프레임을 만들어서 색깔론으로 야권단일후보를 공략한 것이 먹혀들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선거 때마다 터져 나오는 '색깔론'과 '종북타령'은 선거막판에 터진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맞물리면서 이른바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왔다는 것이다. 앞으로의 선거에서도 '보수 대 진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야권이 승리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IMG1]▶투표율이 75.8%로 예상보다 높았는데도 역전하지 못한 이유는? = 앞서 설명한 대로 '보수 대 진보'의 대결구도로 선거가 치러지면서 높은 투표율이 야권에 유리하지 못한 것이다. 야권의 막판 선거 전략은 투표율 높이기에 집중돼 있었다. 문재인 후보나 안철수 전 후보도 대중연설의 상당부분을 투표에 참가해 달라는 것이었다. 선거당일에도 SNS 등에서는 '투표 인증샷 릴레이'가 펼쳐지면서 투표율이 급상승 했다. 투표율이 16대 대선 때보다도 높은 것으로 집계되면서 야권에서는 당선을 낙관하는 분위기였지만 방송사 출구조사결과가 발표되면서 혼란에 빠지기도 했다. 18대 대선의 75.8% 투표율은 17대 대선의 63.3%에 비해 12.5% 포인트 상승한 것이고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16대 대선의 70.83%도 넘어선 것이다. 야권에서는 투표율 77%면 100% 당선으로 예측을 했는데 이 예측이 빗나간 것이다. 중앙선관위에 집계에 따르면 제18대 대선 선거인명부의 20대 유권자는 661만6873명, 30대 유권자는 815만0405명인 반면, 50대 유권자는 777만0075명, 60대 이상은 841만1942명이다. 17대 대선과 비교해 50~60대 유권자 수는 늘었지만 20~30대의 유권자 수는 오히려 줄었다. 이 때문에 '투표율이 높으면 야권 후보가 승리한다'는 그동안의 가정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특히 2002년 16대 대선때는 20~30대 유권자는 48.3%에서 38.3%로 10%포인트가 줄었는데 50대 이상유권자는 29.3%에서 40%로 10%포인트 이상 늘었다. 투표율이 올랐지만 젊은 층이 투표장에 많이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는 얘기다. 실제 투표를 하러갔을 때 젊은 층보다는 노년층이 더 많았다. 노년층에서는 아직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짙게 남아 있는 만큼 그 향수가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트위터에서는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다고 죽은 박정희가 살아있는 우리를 삼켰다!'는 트윗이 리트윗 되고 있다. = '보수는 비리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친노책임론은 민주당 내부에서 나오는 말이다. 당권경쟁 과정에서 또 후보경선과정에서 이런 말들이나왔고 대선 막판에도 친노들이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들이 계속 나돌았다. '초박빙'으로 불리는 대선에서 있는 힘을 다 모아도 힘든 승부가 될까 말까 했는데 당내에서는 선거운동에 총력을 모으기보다는 책임론이 계속 흘러나왔다. '친노 책임론'이라는 게 사실은 별 의미가 없는 얘기다. 문재인 후보가 친노의 몸통이자 상징인데 몸통을 제외하고 가지를 아무리 쳐내더라도 친노는 사라지지 않을 것 아니겠나? 후보 경선과정에서는 문재인 후보와 경쟁하는 다른 후보들이 주장할 수 있겠지만 선거전이 시작된 이후에도 당내에서 이런 주장이 계속 흘러나온다는 건 문제가 있는 것이다. 4.11 총선에서 야권이 야권대통합을 이뤘지만 선거결과에서는 새누리당에 1당을 내줘야 했다. 이번에도 야권후보는 단일화가 이뤄졌지만 패배한 것이다. 민주당이 선거 패배에 따른 후폭풍에 시달릴 것인데 이 과정에서 '친노탓', '안철수 탓' 등 남의 탓만 한다면 앞으로도 선거과정에서의 패배가 계속 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재인 후보는 이날 대선 패배를 인정하며 "정권교체와 새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열망을 이루지 못해 죄송하다. 모든 것은 다 저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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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세계를 읽어주는 나뭇잎숨결
글쓴이 : 나뭇잎숨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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