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으로행복

[스크랩]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조선일보 2013. 1. 1~4

good해월 2013. 1. 5. 06:59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1] 독일 현지 르포/2013. 1. 1
광부 7936명·간호사 1만1057명, 1963년부터 1977년까지 독일 파견
"매일 막장서 2~3명 부상… 쉬고 싶어 망치로 손 쳐달라 부탁도 했지
당시 조국으로 보낸 1억달러, 경제 발전 밑거름됐다는 게 자랑스럽다"

 

 
파독 광부 출신 김근철씨가 지난달 14일 독일 아헨의 옛 에밀마이리시 광산 자리에 전시된 화차를 가리키고 있다. /양모듬 특파원

1963년 12월 21일 가난한 나라 한국의 젊은이 123명이 독일에서 광부로 일하려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1966년엔 간호사 128명이 독일 땅을 밟았다. 1977년까지 광부 7936명과 간호사 1만1057명이 독일로 파견됐다. 광부·간호사를 파견하며 빌린 차관과 그들이 송금한 1억여 달러의 외화는 한국 경제 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50년 세월이 흐른 지금 그들은 "우리가 흘린 눈물과 땀의 가치를 후대에 전하고 싶다"고 말한다.

 

"저기 돌산 보이세요? 실은 석탄을 캐내면서 파올린 돌이 쌓인 거예요. 우린 '버럭산'이라고 불렀어요."

독일 서부 아헨에 사는 김근철(75)씨는 지난달 14일 시 외곽 공업지역 아돌프 광산을 찾았다. 그는 높이 20~30m쯤 돼 보이는 돌산을 보더니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50년 전 처음 여기 왔을 때 신체검사 받고 가장 먼저 한 작업이 저곳 주위에 나무 심는 일이었는데…."

김씨는 1963년 12월 21일 파독 광부 1진 123명 중 60명과 함께 아돌프 광산에 배치됐다. 서울 김포공항을 출발해 알래스카와 뒤셀도르프 공항을 거쳐 19시간 걸리는 길이었다. 탄광 풍경을 보고는 겁이 덜컥 났다. 그래도 한국에선 신학대학을 다닌 목사 지망생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나라에서 광부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 농사일을 돕고 있을 때 어느 날 한 친구가 신문을 가져왔다. '파독 광부 모집'. 인생이란 때로 우연이 결정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처음 5년간 10명이 죽었어요. 거의 매일 2~3명씩 막장에서 부상을 당했지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좀 쉬게 망치로 내 손을 내리쳐달라'고 한 동료도 있었어요."

김씨가 독일에 광부로 가게 된 큰 배경에는 1960년대 초 어려웠던 미국의 경제 사정이 있다. 미국은 경기가 나빠지자 한국 등 제3세계에 지원하던 무상원조를 중단했다. 박정희 정부는 독일(서독)로 눈을 돌렸다.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에 파견하고 대신 3000만달러의 차관을 빌렸다. 이 차관과 그들이 송금한 총 1억여 달러는 한국경제발전의 밑거름이 됐다. 1963년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했던 한국은 반세기 만에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가 넘었고 세계 15위 경제대국(GDP 기준)이 됐다.

파독 광부들은 탄광촌 하숙집에서 한 방에 3명이 같이 살았다. 일당은 19마르크. 당시 한국 돈으로 1222원(1964년 환율 기준)이다. 독일에선 맥주 대여섯 잔밖에 못 마실 돈이었지만 한국에 보내면 큰돈이 됐다.

1961년 11월 한국 정부는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고 차관을 받기 위한 협정을 독일(서독)과 체결했다. 1963년 12월부터 1977년 10월까지 광부 7936명과 간호사·간호조무사 1만1057명이 독일에 파견됐다. 광부들은 1000m 아래 지하 광산에서 석탄을 캤다. 사진은 근무 중 휴식을 취하고 있는 광부들의 모습. /한국산업개발연구원 제공

파독 1진 광부인 조립(73)씨는 "우리 경제 발전에 기여한 파독 광부였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처음 여기 오니까 독일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전쟁과 가난밖에 없었어요. 부끄러웠지요. 그런데 10년 후 한국에 가보니 흙빛 민둥산들이 나무가 울창한 푸른 산이 돼 있더라고요. 독일의 아우토반 같은 고속도로도 생겼고요. 그때 처음으로 내 조국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꺼낼 수 있었어요. 희망 없는 나라에서 희망 있는 나라가 된 거예요."

 

독일에 남아 있는 파독 광부 출신들은 '재독한인글뤽아우프회'를 만들어 매년 모임을 갖고 있다. '글뤽아우프'는 독일 광부들이 '무사히 지상에서 다시 만나자'는 뜻으로 하는 인사다. 회원들이 근무 당시 적립했던 돈을 모아 2009년 에센에 파독광부회관도 세웠다. 지난달 15일 파독광부회관에서 임시총회가 열렸다. 독일 전역에 흩어져 살던 회원 80여명이 모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사회자의 구령에 맞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애국가를 부르고,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했다. "우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어요. 세월이 지날수록 조국이 자랑스럽고 조국을 향한 마음이 더 간절해집니다."(고창원 회장)

그러나 허전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해 회원 10여명이 세상을 떠났다. "어떤 보상을 바라는 건 아닙니다. 다만 조국이 우리를 잊고 있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어요." 그는 "우리가 다 사라지면 파독 노동자들과 한국 산업화의 역사까지 함께 묻혀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고 했다.

 

 

20대때 독일 간 간호사 "가족 울까 편지도 참아, 결근하자 독일인 간호부장이 기숙사로 문병을 왔다가…" / 조선일보 2013. 1. 4

  • 미헬슈타트(독일)=양모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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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派獨 광부·간호사 50년 - 그 시절을 다음 세대에게 바친다]
    [2] 50년전 독일로 떠난 딸들

    獨 병원측이 '동백아가씨' 틀어주며 한식 차린 날
    양배추 김치에 목메어 부둥켜 안고 눈물만…
    라인江 기적 독일인도 '야근 악바리'에 놀라더라
    그 눈물젖은 외화가 내 부모·형제·조국을 일으켜

    파독 간호보조원(현 간호조무사) 출신의 재독 화가 노은님(67)씨의 작업실은 독일 남서부 2만명이 사는 작은 도시 미헬슈타트에 있는 중세 유럽풍의 성(城)이었다. 250년 된 성에서 화가는 올해 미국에서 열리는 전시회 준비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색채로 그린 새와 물고기 그림이 집안 곳곳 가득했다.

    노씨는 24세 때인 1970년 독일로 갔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지 사업이 실패해 '어디로든 멀리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다. 그는 우연히 '파독 간호원(간호사) 모집'이란 신문 광고를 보고 주저 없이 떠나기로 결심했다.

    처음 배치된 곳은 외항 선원 사고가 많은 항구 도시 함부르크의 시립외과병원이었다.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진 선원들이 거의 매일 들이닥쳤다. 일은 고되고, 낯선 나라에서 홀로 지내는 하루하루는 외로웠다. 그 힘든 날들을 견디기 위해 고향 전주의 풍경을 떠올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노씨가 어느 날 몸이 아파 결근하자 독일인 간호부장이 기숙사로 문병을 왔다가 그동안 그린 그림 수십점을 보게 됐다. 간호부장은 "병원에서 전시회를 열자"고 했다. 노씨는 "전시회를 열었더니 그림이 팔렸다. 내 1~2년치 연봉을 내고 그림을 사간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전시회가 끝나자 이번엔 병원장이 추천서를 써줘 함부르크 국립 조형예술대학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졸업 후 모교 교수가 됐고 동료 독일인 교수와 결혼했다. 1982년 고(故) 백남준의 주선으로 고국에서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여러 차례 전시회도 열었다.

    화가 노은님씨와 남편 게르하르트 바치씨. 노 화가는 1990년부터 2010년까지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남편은 이 대학의 동료 교수였다. /미헬슈타트(독일)=양모듬 특파원
    파독 간호사 사업은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지속됐다. 광부 파견과 비슷한 시기였다. 당시 독일은 부족한 간호 인력을 한국에서 충당하길 원했고 우리 정부는 간호사들이 송금한 외화를 경제 발전에 투입하려 했다.

    정부 통계에 따르면 사업이 본격 시작하기 전 민간 차원에서 떠난 간호사까지 포함해 1만1057명이 당시 독일로 갔다. 현직 간호사를 비롯해 단기 교육을 받은 간호조무사들이 독일 각급 병원에서 일했다. 간호사는 야근이 많아 독일 여성들 사이에서도 힘든 직업으로 통했다.

    정부는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독일에 간호사를 파견했다.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인 간호사들이 기피하는 야근을 자청하며 돈을 벌어 조국의 부모 형제들 생활비와 학비로 보냈다. 사진은 1960년대 한복을 차려입고 독일의 한 공항에 내린 파독 간호사들.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독일로 간 한국 여성 간호사들은 부지런히, 악착같이 일했다. 수당이 많은 야간 근무를 도맡아 했고, 쉬는 날에도 다른 병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1969년부터 3년간 듀스부르크시립병원 간호조무사로 일했던 윤기복(67)씨는 "그땐 정말 수도 없이 야근을 했다"고 말했다. 윤씨는 오후 8시부터 다음 날 오전 6시까지 신생아 병동에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우유를 먹이고 목욕을 시켰다. 15일간 야근하면 10일을 쉴 수 있었다. 남들이 한 달 700마르크 벌 때 윤씨는 병원 두 곳에서 야간 근무를 하며 1200마르크를 벌었다.

    4남매의 장녀인 윤씨는 "아버지가 양복점을 하다가 진 빚을 갚아야 했고, 동생들 학비도 대야 했다. 힘들다는 생각을 할 틈이 없었다"고 했다. 화가 노은님씨도 "김치 담그기 위해 양배추 사는 돈을 제외하곤 거의 전액을 부모님께 보냈다"고 했다. 노씨는 "돈을 보내면서 외로운 심정을 편지로 써서 보냈는데 가족이 내 편지 읽으며 운다는 걸 알고는 돈만 보냈다"고 했다.

    독일인들은 처음엔 "한국 간호사들은 돈 욕심이 많은가보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 간호사들이 죽기 살기로 일하며 번 돈을 가족들 생활비로 보내거나 자신의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는 것을 알고는 놀라워했다.

    독일의 한 병원에서 근무 중인 파독 간호사들이 독일 의사·간호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파독 간호사들의 근면한 모습은 독일인들에게도 감동을 줬다. /한국파독광부간호사간호조무사연합회 제공

    꽃다운 20대, 타향살이의 설움이 터져 나올 때면 간호사들은 서로 껴안고 울었다. 윤기복씨는 병원 측이 한국인 간호사를 위해 마련해준 한식을 먹으며 울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베트남 쌀로 지은 푸슬푸슬 한 밥에 양배추 김치를 보니 목이 메었다. 그는 "우리를 위한다고 병원이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하는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틀어줬는데 그걸 들으며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차별에 대한 설움은 없었다. 한국에서 간호사 생활을 하다 독일로 간 백정신(68)씨는 "파독 간호사는 독일인 간호사와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외국인 차별 같은 것은 없었다"고 했다. 베스트팔렌 소아과병원에서 근무했던 황보수자(71)씨는 "독일 간호사보다 인간적으로 못한 대접을 받는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고 했다.

     

     

    출처 : 걸으며 노래부르자
    글쓴이 : august le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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