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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25의 진실]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공모

good해월 2015. 7. 26. 08:17


[6·25의 진실]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 공모

H아워 1950년 6월 25일 새벽

 

  

글/ 이원홍(전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일공사, KBS 사장, 문화공보부장관 역임)

 

역사바로세우기’의 거짓 함정

 

우리는 해방 68년을 민주주의 환상에 미쳐 지냈다. 그 환상이 우리들의 민주주의를 지켜주는 것으로 믿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파괴하려는 것까지 지켜주어야 한다”는 ‘예절’을 정직하게 지켜왔다. 그래서 자민투(自民鬪)니 민민투(民民鬪)니, 주사파(主思派)니 뭐니 하는 민주화를 표방한다는 운동권에 나라가 끌려 다니는 것 까지도 민주주의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다.
마침내 경찰무기고를 파괴하고 약탈한 무기로 무장한 시민군이란 사람들이 국군에게 총을 쏘며 교전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민주화의 투사로 표창 받으며 엄청난 거액의 보상금을 지급받고 있다. 
민주화투쟁세력이 맨 먼저 들고 나선 것이 ‘역사바로세우기’였다. 그 역사의 대부분이 북한과 관계되는 것들이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문제와 6·25발발의 원인에 집중되었다. 종북좌파는 국가의 정통성(正統性)에 시비를 걸며 북한을 찬양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아동들에게 6·25가 한국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가르쳤다. 국토와 민족의 분단책임을 한국에 떠넘겼다. 종북좌파란 ‘북쪽이 시키는 대로 하는 남쪽사람’의 집단이다.
그러나 1991년 12월 25일 소련(소비에트社會主義共和國聯邦)의 소멸로 스탈린의 비밀문서가 공개되어 종북좌파의 거짓말이 들어나게 되었다. 그들의 주장은 모두가 사실과 다른 허구였다. 엉터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아직도 북한의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6·25를 북침이라 가르치는 선생들이 활보하고 있다. 올해가 6·25 63주년에 정전협정(停戰協定) 60주년을 맞는 해다. 환갑이 넘은 거짓말의 진실을 스탈린의 비밀문서와 기타 참고문헌에서 간추려 메모로 정리해두고자 한다.

 

① 소련주도 얄타회담에 조선독립 없었다


최초로 조선(당시)의 독립을 선언한 것은 카이로 회담(1943. 11. 27)에서 회동한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와 중화민국 대원수 장개석(蔣介石), 그리고 영국 수상 처칠 등 3대 연합국의 수뇌였다. 그들은 회담에서 “조선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조선이 곧 절차에 따라(in due course) 자유와 독립을 하도록 결의하였다”고 선언했다. 조선독립 조항을 주도한 것은 장개석이었다. 
1945년 2월 11일에는 소련의 스탈린과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이 회동한 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참전(對日參戰)을 결정하였으나 조선의 독립을 결정한 카이로 선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그리고 1945년 7월 26일 포츠담에서 회동한 미국과 중화민국, 영국의 수뇌(首腦)는 다시 일본의 항복을 촉구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결정한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재천명했다. 

 

② 일본 항복 전에 김일성 정권 수립


소련군은 1945년 8월 8일 북한의 천진, 라진을 공격함과 동시에 만주의 관동군과 전투를 시작했다. 8월 12일 청진을 점령했다. 그리고 북한 전역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 때 미군은 오키나와에 있었다. 연합군이 일본의 항복을 수령하는 날 소련군은 이미 북한에 주둔하고 있었다. 다급해진 미국은 38선 이북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소련군이, 그 이남을 미군이 담당한다는 안을 만들어 스탈린의 동의를 얻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9월 2일 이것을 일반명령(一般命令) 제1호에 포함시켜 포고했다. 한반도를 38선으로 분할 점령한다는 결정을 내린 일은 전혀 없었다. W·J·시볼트(맥아더 사령부 외교국장)는 그의 회고록에서 “38선에 의한 분할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련이 포기하거나 조정하는 것을 집요하게 거부했다”고 밝혔다.
미군은 9월 8일 한국에 상륙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계속 북한을 점령하여 38선을 조선의 분할점령선(分割占領線)으로 고정시키고 남북한의 왕래를 차단했다. 

 

③유엔 법통절차 거부 김일성 정권 정통성 없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 영, 소, 3개국의 외상회의(外相會議)에서 한반도에 통일정부를 수립한다는데 소련이 동의 했다. 그러나 소련은 그 임무를 수행하는 4개국 합동위원회(合同委員會:중화민국이 참가)구성에 반대했다. 미국은 소련의 반대로 조선독립문제 처리가 지연되자 유엔 총회에 바로 제기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군당국(軍當局)이 임명한 대표자가 아닌 새로운 대표자를 선출하는 선거를 유엔 조선위원회 감시하에 남북한 함께 실시하여 의회(議會)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의안을 43대0으로 가결시켰다. 조선위원회는 임무수행을 위해 북한에 들어가려 하였으나 입북(入北)을 거부당했다. 소련과의 타협에 실패한 유엔은 1948년 5월 10일 유엔감독하에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게 했다.
그해 12월 12일 유엔총회는 소련의 격렬한 방해를 제치고 유엔 감독하에 실시된 선거로 수립된 대한민국정부를 한반도의 유일합법정부임을 승인하는 결의안을 46대6, 기권1(스웨덴)로 가결했다. 그리고 유엔은 조선위원단을 개편하여 존속시켜 한반도의 통일정부수립을 계속하기로 결의했다. 한국정부는 1949년 1월 1일 미국을 비롯한 32개국의 승인을 획득했다.
소련은 1948년 9월 9일, 예정대로 38선 이북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고 선언했다.
이상이 한국과 북한의 정직한 차이다. 어느 쪽이 법통(法統)인가. 어느 쪽이 정통(正統)인가. 북한은 원초적으로 부정출발이었다. 경기장에서는 ‘퇴장’에 해당하는 범칙(犯則)이다. 북한은 국제법에 관계없이 소련이 단독으로 세운 반칙국가(反則國家)다. 한국은 소련이 참가한 유엔총회가 결정한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비밀투표에 의한 보통선거로 구성된 의회(議會)에서 민주적 절차에 따라 수립되어 유엔의 승인을 받은 정칙국가(正則國家)다. 정칙이 정통인가 반칙이 정통인가. 종북좌파의 역사관은 우리의 역사관이 아니다.

 

④ 소련 앞서 미군철수로 한국 방위 공백


소련은 유엔이 승인한 한국의 유엔가입을 거부권행사로 막았다. 한국위원단의 개편 존속에 반대하는 소련의 제안이 유엔총회에서 46대6으로 부결되었다. 그러자 소련의 말리크 외상이 미군철수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래서 한국위원단 존속결의안 3항과 5항에 “미소(美蘇)양군의 가능한 한 신속한 철수”와 “한국위원단에게 철수의 감시와 확인임무를 부여”하는 내용을 포함시켰다. 미국은 1949년 1월부터 진행해온 미군철수를 6월 29일에 완료했다. 한국위원단도 같은 해 7월 28일 철수확인 보고서를 유엔총회에 제출했다. 시볼트는 “이승만 대통령의 요청으로 1개 연대정도의 전투부대를 잔류시키기로 했다”고 밝혔다. 소련정부는 1948년 12월 25일에 소련군의 철수를 완료했다고 선언했지만 한국위원단의 확인을 허가하지 않았다. 소련 군정하에 있었던 1946년 7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 스탈린과 회담했다.

 

김일성의 스탈린 공작

 

① 김일성, 박헌영 데리고 다니며 원조 약속하는 비밀합의 체결을 소련에 요구했다.
1949년 1월 17일 김일성과 박헌영이 평양 주재 소련대사 쉬티코프와 회담했다. 쉬티코프는 그 결과를 모로토프 외상(外相)에게 전문으로 보고했다.
“김과 박은 북한이 소련과 우호상호원조조약(友好相互援助條約)체결을 요구해 온 것을 거부하자 소련의 원조를 약속하는 비밀합의(秘密合意)를 체결해 달라고 요구했다.”

 

② 1949년 3월 5일, 김일성이 38선 교전으로 긴장시켜 스탈린 회담을 이끌어냈다.
김일성은 38선이 긴장상태라는 구실을 만들어 스탈린과의 회담약속을 받았다. 이것은 두 번째 회담이다. 다음은 공식기록의 일부이다.

 
“*김일성: 남조선에는 아직도 미군이 주둔하여 북조선에 대한 책동을 꾸미고 있다. 우리는 육군을 갖고 있지만 바다의 방위력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소련의 지원이 필요하다.
*스탈린: 남조선에 미군이 얼마나 주둔하고 있는가.
*김일성: 2만 명 미만이다.
*쉬티코프: 약 1만5천에서 2만 명이다.
*스탈린: 남조선에는 국군이 있는가.
*김일성: 약 6만명 규모의 국군이 있다.
*스탈린: 그 숫자는 상비군인가. 아니면 경찰병력도 포함되어 있는가.
*김일성: 상비군만의 숫자다.
*스탈린: (기가 막힌 듯이) 당신들은 그 정도를 겁내고 있는가.
*김일성: 아니다. 그렇지 않다. 단 해전(海戰)에 필요한 전투력이 있을 경우에 한해서 이다.
*스탈린: 북과 남 어느 쪽 전투력이 강하다고 보는가. 
*박헌영: 북이 강하다.
*스탈린: 조선(북한)에 일본이 남겨둔 조선소가 있는가. 예를 들면 청진(淸津)이나 기타 다른 지역에….
*김일성: 조선소는 없다.
*쉬티코프: 조선소가 있지만 극히 소규모라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스탈린: 해군력 요청에 대해서는 상응한 원조를 하겠다. 그 뿐 아니라 조선(북한)은 항공기를 보유할 필요도 있다. 남조선군부에 스파이요원은 침투해 있는가.
*박헌영: 침투해 있지만 아직 노출시키지 않고 있다.
*스탈린: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잘한 일이다. 노출시킬 필요는 없다. 남측도 북측 군내에 스파이요원을 침투시키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하도록 지시를 내려달라. 38선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남측이 공격해 들어와 수 개 거점을 점령했으나 곧바로 그 거점을 탈환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김일성: 남측이 우리 군(軍)내부에 스파이를 침투시키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필요한 조치도 강구하고 있다. 38선에 있는 강원도(江原道)에서 남측과 소규모 교전이 있었다. 그 때 경찰 부대 장비는 보잘 것 없었고 우리 정규군이 나타나자 퇴각했다.
*스탈린: 남측을 격퇴시켰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그들 스스로 퇴각했다는 말인가.
*김일성: 전투결과 남측이 격퇴되었고 그들은 국경선에서 퇴각했다.”

 

③ 김일성과 박헌영, 쉬티코프에게 남침전쟁 설득.
김일성과 박헌영은 8월 12일과 14일 두 차례에 걸쳐 휴가차 모스크바로 떠나는 북한주재 소련대사 쉬티코프를 만나 전쟁을 시작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쉬티코프 부재중의 대사대리에는 툰킨이 지명되었다.
쉬티코프가 김일성 면담내용을 모스크바에 알린 1949년 8월 12일자 전문
“김일성은 남측에 대한 진격준비를 개시하는 것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남진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이승만 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봉기가 남측지역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쉬티코프는 ‘스탈린 동지가 1949년 3월 11일 모스크바 회담에서 밝힌 소련과 미국간에 38도선에 관한 합의사항이 엄연히 존재한다. 북측의 공격이 정당성을 가지려면 남한이 북한에 대하여 선제공격을 가해 오는 경우에 한 한다’고 말한 것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김일성은 38도선은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 때에는 의미를 가지지만 미군철수와 함께 38선이라는 장애물은 사실상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김일성은 국지작전(局地作戰)으로부터 남진(南進)을 개시할 것을 제안했다. 그 작전목적은 남측 관할영역인 옹진반도(甕津半島)의 점령이라고 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회담에서 남한이 선제공격을 해 오도록 하는 것이 침략전개시의 조건이라고 했다)”
“8월 27일 쉬티코프는 스탈린에게 남침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제출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평양주재 대리대사 툰킨에게 자기의 개인비서 문일(文日)을 보내 남측이 옹진반도 일부를 점령하기 위해 해주시(海州)에 있는 시멘트공장을 포격할 것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것을 기화삼아 옹진반도 동쪽의 남조선영토와 개성(開城)을 점령하고 상황이 용인하면 남(南)으로 진격한다는 김일성의 계획을 밝혔다. 김일성은 남조선 전체를 2주간, 또는 최장 2개월 이내 점령한다는 자신을 갖고 있다고 했다.” 툰킨은 스탈린으로부터 지시받은 사항을 조사하여 전문으로 보고했다.
“조선(북한)의 군(軍)은 남조선 군의 전 부대에 걸쳐 간첩을 배치해 놓고 있으나 전면전이 발생할 때 그들이 남조선 군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킬 수 있을지는 당언할 수 없다. 북측 자료에 의하면 북조선은 남조선지역에 1500명에서 2000명 정도의 빨치산부대를 가지고 있다. 최근 빨치산 활동은 상당히 강화되었다. 김일성 등은 전쟁이 발발하면 남조선 국민은 북한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며 남조선 전역에서 무장봉기가 발생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쉬티코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정세보고서
“남조선이 노동당(남노당)을 탄압한 결과 당원의 숫자가 1948년 말까지 90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감소되었다. 그 다음 해인 49년에는 더욱 감소되었다. 이와 비슷한 상황은 다른 좌익정치조직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제주도 빨치산 진압작전은 사실상 미군장교가 지휘했다. 전투결과 양측 모두 큰 손실을 입었다. 내륙지역 빨치산 활동은 더욱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우리 협력자 정보에 의하면 현재 2000명의 빨치산이 활동하고 있다. 1949년 중에는 2000건이 넘는 작전을 수행했다.
남조선 군은 7개 보병사단, 5개 독립보병연대 및 수 개 독립대대를 보유하고 있다. 군의 총병력수는 8만5000명이다. 호국군은 5개 여단 5만 명 규모이다.”

쉬티코프, 남침을 서두르는 이유 설명
“김일성과 박헌영 생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한 국가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남조선의 좌익과 중도파와 일부 우익정당 대표를 포함한 조국통일 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창설은 평화적 국가통일을 보장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무력에 의해 통일을 달성한다는 방향으로 선회하였다. 두 사람은 남조선지역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김일성이 남침을 원하고 있으며 소련과 중국공산당의 지원을 열망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미국의 한국방위 포기    

 

 

 ① 시볼트(맥아더 사령부 외교국장)는 그의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한국은 군사적으로 방위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미군의 철수가 당연하다는 말을 나에게 해왔다고 밝혔다. 그리고 맥아더와 애치슨이 분명히 한 그대로 방위선(防衛線)에서 한국이 빠진 것이 북한이 전쟁을 감행한 6·25의 하나의 요소가 되었다는 평론가들의 말에 대해 “두 사람 모두 침략적인 공격에 대응하는 미국의 방위선에서 한국을 특별히 제외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았던 것에 불과하다”고 변명했다.  

 

② 시볼트는 1950년 봄의 북한군 실태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소련은 1948년까지 3개 사단의 북한인민군을 훈련시켰다. 이것은 1950년 봄까지 10개 사단으로 증강되었다. 그 밖에 보병 수개 연대와 기갑여단(機甲旅團), 그리고 공군과 해군 소부대가 있었다. 1950년까지 한국 육군은 총 8개 사단,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호전적인 태도를 이유로 미국의 군사고문단은 전차(戰車)와 중포(重砲), 군용기 등을 한국군에 공급하는 것을 거부해왔다. 공격용무기를 지급하면 38선을 넘어 북진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한국군은 대부대작전훈련(大部隊作戰訓練)과 대전차(對戰車)방위훈련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군사고문단(KMAG)은 한국군이 북한의 위협에 대항할 수 있다는 자신을 표명하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할 때 5만 명분의 무기를 한국에 이양했다.” 

 

③ 맥아더 사령관도 흔히 있는 게릴라를 예견했지만 6·25는 예상하지 못했다.
“역사적 사명을 띠고 서울을 향해가든 주한미국대사(駐韓美國大使) 존·J·무쵸씨가 1948년 8월 14일 도쿄(東京)에 도착했다. 나는 그에게 1주일 정도 체류하면서 맥아더를 만나고 GHQ의 간부들과 친숙해 지도록 권유했다. 도쿄의 사정을 그에게 알려두는 것이 매우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한국문제에 관해서는 정상적인 방도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항상 주의(注意)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을 예견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게릴라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④ 6·25침략 5개월전 한국정부는 가장 큰 문제가 인플레라고 걱정했다.
“도쿄(東京)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 외교사절단장은 오는 사람마다 범용(凡庸)하고 지혜롭지 못해 항상 대립적인 관계였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정항범(鄭恒範)이라는 사람만은 그렇지 않았다. 1949년 10월 정씨가 신성모(申性模)국방장관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여위고 창백한 얼굴로 특이한 발음의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어서 나는 당황했다. 그는 자기를 ‘선장’이라 불러달라고 했다. 국방장관이란 지위에는 부치다는 인상이었다. 그는 한국육군의 전투능력에는 자신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외교관의 만찬회에서 나와 단 두 사람이 되었을 때, 그는 한국군이 북한군에 대항할 수 있게 되려면 아직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심을 털어놓았다. 같은 장소에서 만난 주한미군고문단부대(駐韓美軍顧問團部隊) 윌리엄·L·로버트 준장(准將)은 신(申)장관과는 반대로 한국군의 결점을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용감무쌍하다고 선전하며 ‘만약 공산군이 쳐내려오면 모두 포로로 잡을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1950년 초 나는 트루먼 대통령의 이동대사(移動大使) 필립·C·조셉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공식적인 정세보고(情勢報告)를 하는 자리에 동석했으나 전쟁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내용은 없었다. 전쟁이 터지는 5개월 전인데도 미국측과 한국정부요인들은 모두 인플레가 가장 큰 걱정이라는 말만 늘어놓았다. 로버트 사령관과 다른 장교들도 한국군이 매우 우수하며 약간의 고사포(高射砲)와 몇 척의 쾌속정과 구(舊) P51급의 전투기 10수대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 남침전쟁 승인

 

 

 ① 중국 동독 공산당정부 수립에 고무된 김일성
스탈린은 1949년 10월 1일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정부(共産黨政府)가 중국에 들어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김일성도 덩달아 여기에 고무되었다. 소련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 선포된 다음 날인 10월 2일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중화민국과 단교했다. 김일성도 10월 6일 중국과 국교를 수립하고 모택동을 통일전략의 귀감으로 삼았다. 10월 7일에는 동독(東獨)의 공산당정부 독일민주공화국(獨逸民主共和國)이 선포되는 것 등, 공산당의 세력규합이 눈에 띄게 증강되었다.
그러한 정세를 더욱 고무시키는 듯 1949년 12월 16일부터 다음 해 1950년 2월 17일까지 모택동이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회담했다. · 양국을 기축으로 하는 공산권의 질서가 굳어졌다.
그러나 한국을 몰아치는 역풍은 더욱 강렬해 졌다.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동부아시아 방위선(防衛線)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애치슨 라인(不後退防衛線)’이 선포되었다. 반대로 모택동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조선인부대(朝鮮人部隊) 1만4000명을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영향이 강화되었다. 김일성의 남침계획도 힘을 얻게 되었다. 스탈린에 대한 김일성의 재촉도 강해졌다. 그것을 조정하는 역할은 평양주재 소련대사 쉬티코프의 임무였다.   

 

 

 ② 스탈린, 김일성 초청 비밀리에 통보
1950년 1월 30일 쉬티코프가 스탈린이 보낸 전문 한 통을 수령했다.
“…남한에 대한 대과업에는 상당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도록 과업을 추진해야 한다. 만약 김일성이 이 사안에 대하여 회담을 원하면 나는 기꺼이 그를 맞아들여 회담에 응할 용의가 있다. 내가 이 건에 대하여 김일성을 지원할 용의가 있음을 전해주기 바란다.”
김일성과 면담한 쉬티코프는 다음과 같은 보고전문을 스탈린에게 보냈다.
“귀하의 지시에 따라 1월 17일 김일성 동지와 회담했다. 김일성은 대단히 만족했다. 김일성과 만나 이 건에 대하여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귀하의 동의는 김일성에게 크나큰 감명을 준 것 같다.”
스틀린은 2월 2일 쉬티코프에게 추가지시를 내렸다.
“김일성이 나와 검토하고 있는 문제는 극비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김일성 동지에게 설명하라. 당분간은 다른 지도부 인사에게도, 중국동지들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 모스크바에 체재하고 있는 모택동과의 회담에서 우리는 북조선에 대해 지원을 제공할 필요성과 가능성 및 북조선의 군사적 잠재력을 제고시키는 사항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했다.”

 

 

③ 김일성,  10개 사단 편성 요구
김일성은 2월 4일 쉬티코프를 방문하여 사단(師團)을 10개로 증강하기 위해 3개 사단을 추가로 편성하는 사안을 협의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51년에 시행하게 되어 있는 소련의 차관공여(借款供與)를 50년으로 앞당기는 문제도 건의하도록 요구했다.
마침내 1950년 3월 30일 김일성은 박헌영과 함께 대규모 방소단을 거느리고 모스크바로 향해 평양을 출발했다. 스탈린은 김일성 일행이 귀국한 4월 25일까지 약 1개월간의 체류기간동안 3회에 걸쳐 스탈린과 회담했다.   
먼저 밝혀두고자 하는 것은 이 글의 기본자료인 ‘한국전쟁의 진실’(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발행)의 저자 아나톨리 토르쿠노프(Anatoly Torkunov)가 남침준비를 위한 김일성과 스탈린 회담의 마지막 부분인 이 세 번째 총괄회담의 대담기록을 소련 공문서관에서 발견할 수 없었다고 확인한 사실이다. 토르쿠노프는 수소문 끝에 역사학자 비오르코고노프 장군의 개인소장으로 보존되고 있는 사본을 읽고 회담에 동석했던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로 회담내용을 파악하였다고 밝혔다. 토르쿠노프가 기술한 회담내용을 다시 간추려 정리해 본다.

 

 

④ 김일성과 스탈린 6·25개전 시기 결정
“스탈린은 국제정세가 변하고 있어 조선통일을 위해 보다 적극적 행동을 취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국제관계측면에서는 중국공산당이 국민당(國民黨)과의 전쟁의 필요성에서 해방되어 이제 조선문제에 보다 주의를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긴급사태가 발생할 경우 중화인민공화국은 군대로 지원할 것이다. 심리적으로도 중국공산주의자의 승리가 중요하다. 중국은 아시아 혁명가들의 힘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아시아의 반동주의자와 서구 및 미국 후원자들과의 연대도 약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미국측은 중국에서 철수하여 중국공산당과 싸우지도 않았다.
중국과 소련이 동맹조약을 체결하고 있는 지금, 미국은 아시아의 공산주의자를 자극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은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련이 핵보유국이 된 사실 때문에 조선문제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기운이 우세하다.
그러나 워싱턴이 전쟁에 개입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절대적 확신은 금물이라고 지적했다. 더욱 중요한 조건은 조선의 해방투쟁에 대한 중국의 지원이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동맹을 체결한 모습을 지켜본 미국이 함부로 큰전쟁에 개입하는 위험한 모험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을 말했다. 김일성의 말에 의하면 모택동은 중국혁명을 달성하면 군대를 포함한 조선지원을 여러 차례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은 국가통일에는 자체병력을 동원하는 방법을 선택할 것이며 성공을 믿고 있다고 하였다.

 

 

⑤ 3단계작전…38선에 집결, 평화통일 제안, 옹진반도 공격
또한 스탈린은 북한 군사력을 양적, 질적으로 대폭 증강시키는 것을 들고 나왔다. 공격의 상세한 계획도 불가결이다. 삼단계(三段階)로 작전을 구분하여 실시하는 것이 적절하다. 먼저 38선 부근에 부대를 집결시킨다. 그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평화통일의 새로운 발의(發議)를 한다. 서울이 그것을 거부하면 공격을 시작할 것이다. 옹진반도를 따라 공격을 가한다는 발상은 좋다. 이것은 누가 먼저 군사행동을 하였는가 라는 사실을 은폐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남측의 반격후에 전선을 확대하는 기회가 올 것이다. 전쟁은 전격전(電擊戰)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적에게 북측에 들어오는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소련의 직접참전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아시아 정세에 밝은 모택동을 의지하여야 한다고 했다.
김일성은 공격이 빨치산을 지원함으로써 빨치산 활동이 더욱 격화되면 남조선당국에 대한 봉기에는 20만 명의 당원이 참가할 것이라고 소련 지도자에게 보증했다.
북조선 군은 1950년 여름까지 총동원한다는 것을 두 사람(김일성과 스탈린)이 결정했다.(6·25의 개전시기를 결정한 것) 북조선군총참모부(北朝鮮軍總參謀部)는 소련 고문의 도움을 받아 상세한 공격계획을 작성한다.

 

 

김일성과 모택동의 공조

 

 

 모택동은 이미 스탈린과 김일성 모의에 제3의 주역으로 가담했다. 스탈린과도 의견조정이 끝났다. 모택동은 스탈린이 김일성과의 최종 회담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던 것에 분노하고 있었다. 어쨌든 김일성은 스탈린의 지시대로 남침계획에 대한 모택동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김일성은 김일(金一)을 북경(北京)에 파견하고 주중대사 이주연(李周淵)과 함께 방중(訪中)문제를 협의하도록 했다. 소련의 주중대사(駐中大使) 로시틴은 스탈린과 모택동의 연결고리 역할을 담당했다.
김일성은 박헌영과 대표단을 이끌고 1950년 5월 13일 북경에 도착했다. 당일 저녁 모택동과 주은래(周恩來) 등의 환영모임에 참석했다. 스탈린은 로시틴을 통해 모택동에게 회담에 관한 친서를 전달했다. “현재 상황이 과거와는 달라졌기 때문에 북조선이 군사작전에 착수할 수 있으나 모택동 동지의 직접검토를 필요로 하는 문제”라고 강조한 내용이었다.
5월 14일 드디어 6·25음모의 최종 단계 회담이 시작 되었다. 다음 날인 5월 15일에도 회담이 계속되었다. 로시틴이 스탈린에게 보고한 전문에서 그 내용을 파악해 본다.
“모택동 동지는 북조선 지도부가 내린 남북 조선의 정세판단과 평양 서울의 힘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동의했다. 모택동 동지는 또한 소ㆍ중 조약과 관련하여 통일 후에 북한과 우호동맹(友好同盟)상호원조조약(相互援助條約)에 조인하는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 문제의 최종결정은 스탈린 동지가 의견을 표명하여야 채택될 것이다.”
“5월 15일 모택동 동지는 남조선을 공격하는 군사계획에 관해 김일성 박헌영과 상세한 의견을 교환했다. 주은래에 의하면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합의한 3단계 공격계획에 관해 설명했는데 모택동 동지가 그 계획의 전부를 승인했다. 그 후 모택동 동지는 김일성에게 일련의 충고를 했다. ‘북조선 인민군은 충분한 준비를 하여야한다. 신속하게 기동하여 대도시(大都市)를 포위하고 도시점령(都市占領)에 너무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적(敵)의 전투력을 파쇄(破碎)하는데 주안을 두어야 한다’고 했다.

 

 

 ① 모택동, 김일성 축하만찬회 참석
모택동 동지는 김일성에게 일본군(日本軍)이 전쟁에 개입할 것인지에 관심을 표명했다. 김일성은 ‘가능성이 매우 낮지만 그래도 역시  미국이 2만에서 3만 명의 일본군을 투입할 가능성은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전쟁추이에 심각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고 말했다.
주은래는 ‘모택동 동지가 일본군이 개입하여 전쟁을 장기화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것 같았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미국 자신이 군사작전에 개입해 오지는 않을까하는 우려도 표명했다.’고 전했다. 주은래에 의하면 김일성은 그런 예측을 일축하고 미국은 극동에서 어떠한 형태의 전투도 준비하고 있지 않다고 단언했다. 미국은 싸움을 포기하고 중국에서 물러났으며 조선에서도 신중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약간 상이한 진술을 했다. ‘모택동 동지가 현재로서는 일본이 전쟁에 개입하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만약 미국이 군사작전에 개입하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하여 우리를 지원하여야 할 것이다. 소련이 참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소련은 미국과 38선 설정에 관한 합의에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이런 협정에 구애받지 않고 부담 없이 우리를 지원할 수가 있다.’고 했다.“
회담성과에 만족한 김일성은 5월 15일 모택동의 환영만찬에서 총괄적인 내용의 감사인사를 했다.
“모택동 동지와 나의 회담은 지극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모택동 동지는 우리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 동지와 합의한 남조선해방계획(南朝鮮解放計劃)을 전폭적으로 승인했다”
5월 16일 스탈린은 중국과 북조선이 우호동맹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는 의견에 대해 지지를 표명하고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했다.
“남조선해방이라는 대과업을 성취하면 곧바로 조약을 비준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북한 동지들의 성공을 확고하게 함과 동시에 조선반도문제에 다른 나라가 개입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②  대남평화통일 제안으로 남침준비 위장
김일성은 침략전쟁의 위장책의 하나로 스탈린이 지시한 대로 평화통일협의를 남측에 제안했다. 1950년 6월 11일 한국측은 일고의 가치 없는 것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그것이 6·25의 청신호라는 것을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김일성은 6월 15일 남침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모든 상황을 점검한 쉬티코프는 스탈린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으로 남침개시를 알렸다.
“6월 25일 새벽에 공격을 개시한다. 최초 북한군의 대규모 부대가 옹진반도를 공격하고 계속하여 남조선의 서해안(西海岸)을 연하여 남하하면서 총공격을 가한다. 드디어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을 확보한다. 동시에 동해안(東海岸)지역의 춘천(春川)과 강릉(江陵)을 해방시킨다. 결과적으로 적(敵)주력부대는 서울일대에서 아군에게 포위되어 괴멸될 것이다. 작전(作戰) 최종단계로 남조선의 나머지지역의 잔적(殘敵)을 소탕하고 도시 및 항만을 탈취함으로써 비로소 전 국토를 해방시킨다.”
김일성은 공격을 7월로 연기하자는 소련측의 주장을 물리치고 1950년 6월 25일 새벽 일제공격을 감행하여 남침을 시작했다.

 
출처 : 좋 은 추억(追憶)
글쓴이 : 로즈마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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