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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일·러 학자들 “환단고기 제국의 역사 진실” 고증

good해월 2016. 3. 20. 08:56

 

중·일·러 학자들 “환단고기 제국의 역사 진실” 고증

 

이을형의 ‘법과 정의’…한국의 상고사 찾기(14)-신시배달국사(神市倍達國史)(6)

필자약력 | 기사입력 2014-02-08 20:40:33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중국의 고대역사는 우리 역사를 훔쳐서 왜곡한 거짓역사이기 때문에 아무 가치가 없다. 중국 고대사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을 지배한 역사였다. 그 한 예로 배달국시대 헌원(軒轅)이 치우천왕(蚩尤天王)과의 전쟁에서 연전연패를 하면서도 오랫동안 치열한 전쟁을 지속한 이유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보면 안다. 중화족(中華族)이 살었던 지역은 산악이나 사막지대로 불모지가 많았다. 이들 지역에서는 물 부족 때문에 문화를 육성하는 지반으로서는 부적당했다기에 강한 국가로 일어나는데 제약을 받았다는 점이다. 반면 동이족이 살았던 평야지대는 생활하기에 편하고 땅이 비옥하며 생산에 적합했기 때문에 문화의 융성에 매우 좋은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다.

 

 

문명의 발전을 크게 일으킨 동이족은 결국 중국을 지배했다. 배달국시대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고대문명이 일어난 것은 이러한 환경과 조건을 갖추어 있기 때문이었다. 우리 한민족도 태고 때 민족이동을 하며 추운 북방의 지대에서 생활을 할 때는 유목생활을 했다. 한민족은 생존을 하기 위해 남으로, 동으로 방목지를 찾아서 풍요한 중원과 요동으로 다른 민족보다도 먼저 선주(先住)해서 그 지역에 거류(居留)하며 토착해 살았다. 기름진 평야지대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게 된 것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문화를 창달시키고 정신적·도덕적 측면에서도 앞서갔다.

 

 

이는 중국뿐만 아니라 인도, 중동, 미 대륙까지 영향을 주며 국세(國勢)를 넓혀 발전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중화족은 인구가 증가하자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은 이민족의 저항에 먼저 철기무기를 만들고 끝없는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태반이 매우 유치한 원시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지금부터 5000년 전에 희랍이나 로마문명의 발달에도 현저한 영향을 주었다. 이는 세계의 근대문명을 발달시키는 바탕이 됐다는 역사적 사실들이 점차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를 무지한 상태로 방치한 탓에 전 세계에 정신적·도덕적 영향을 끼친 위대한 역사를 잃어버리고 있다. 중국이나 인도 등 타민족이 이룬 문명으로 잘못 전해진 까닭에 우리의 역사는 그렇게 왜곡돼 버렸다. 때문에 현재 우리의 자화상은 너무나 비참하다.

 

유교의 공자나 불교의 석가가 바로 한민족으로, 당시 정신적·도덕적 측면에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을 보면 우리가 다른 민족보다도 앞서 중국과 인도에 영향을 끼친 것이 잘 증명된다. 주지하다시피 중국 당나라 때부터 노골적으로 일본과 손을 맞추어 우리 역사를 없애려는 정책으로 인해 진실된 고대사를 기록한 역사서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런데 고려와 조선시대선비, 학자, 전 관리 등이 저술한 한민족의 고대사 책들을 한데 엮은 합본(合本)이 나왔다. 바로 환단고기(桓檀古記)가 그 책이다. 중국과 일본이 역사 말살을 위해 우리 역사서를 모두 없앴으나 이 환단고기에 의해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조선 역사가 되살아나고 있음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오늘은 중복되는 부분이 다소 있더라도 중국이 내세우는 상(商), 요(堯), 순(舜) 등의 나라와 역사의 주인공들이 모두 우리의 지배하에 있었음을 일깨워주는 ‘환단고기’에 대한 평가와 러시아, 중국, 일본 학자들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평가기록들까지 단편적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 학자 “환단고기는 고대 일본족 아는 지름길”
 
먼저 우리 역사서로서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잃어버린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 재생에 크게 도움이 되고 있다. ‘환단고기’의 기록을 중국역사서 및 고지도와 참고해 살펴보면 우리 역사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일찍부터 정주·지배한 것을 잘 알 수 있게 된다. 중국과 일본이 32만권 이상 고서를 분서(焚書) 또는 폐기하며 역사 말살을 시도했지만 그것이 허구임을 환단고기는 보여주고 있다. 중국은 결국 고구려, 백제, 발해의 역사고서(歷史古書)를 모두 없애고 나아가 통째로 우리역사를 왜곡·변조하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일본 역시 우리역사를 왜곡·조작하지만 모두 허황된 허구임이 드러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역사의 진실 앞에 중국과 일본의 역사조작은 무너지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믿는다. 중국과 일본이 그 많은 고서를 없앴음에도 환단고기가 80년대 출판되면서 우리 고대사는 다시 재생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환단고기를 연구하는 외국의 많은 학자들이 우리보다 더 열심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환단고기에 대해 일본의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같은 학자는 “오늘날 환단고기(桓檀古記)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비롯하여 태백일사(太白逸史) 등 조선을 중심으로 한 비사(秘史)이지만 만주, 몽골, 중국으로부터 멀리 서역까지를 무대로 하는 상고사다.

 

 

거란고전과 아울러 읽으면 고대일본민족의 걸어온 길을 밝힐 수 있다. 삼성기전(三聖記傳)과 단군세기(檀君世紀) 첫머리에는 신화적 요소가 들어 있는데 이는 한민족의 우주관, 세계관, 또는 신관(神觀)으로서 연구 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사서(史書)로서 높이 평가되는 동시에 문화로서도 독자적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고 강조하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나오는 지명과 중국 고지도의 내용이 너무나 일치하는 것에서도 우리역사가 세계사에 재평가를 받는 시기에 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따르면 일본은 삼한의 분치(分治) 지역이었으며 일본 황실은 기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흥망에 따라 일본의 왕권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왕족들에 의하여 교체됐었음을 여러 문헌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일본 고대사는 바로 한국고대사의 연장이라고 여러 문헌과 고고학적 고증에 의해 그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三聖記),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記), 규원사화(揆園史話) 백일사(太白逸史), 부도지(符都誌) 제왕운기(帝王韻紀),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의 기록은 우리 민족의 전통사관으로 고대 우리 한국사뿐만 아니라 동양사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하는 지보적(至寶的)인 역사문헌이다. 일본은 역사사실이 없다보니 신화에 의해 역사를 꾸며갔다. 그 허구의 신화에 대한 것을 대문장가로 하여금 화려하게 조작했다.
 
한 일본학자도 이렇게 이야기 했다. “일본의 신화에 있어서 주목해야 할 지금, 일본문화발전의 원천을 보면 역시 일본인의 기질 및 정신이다. 즉, 일본 신화시대의 물질적 문명은 빈약한 것 같았으나 일본의 정신적 문명은 신화에 의해서 그 기질과 정신, 역사를 조작한 것을 알 수 있다”(아끼야마 겐쇼(秋山謙藏)(日本の 歷史, 128면 참조) 이 같이 일본은 없는 역사도 신화로 포장하며 역사를 꾸몄다. 우리의 역사는 1만년을 절반 이하로 잘라내면서 일본 역사는 고무줄같이 늘려 잡았다. 일본의 역사는 2600년이 아니다. 여기서 1천년을 빼야 일본의 제대로 된 역사다. 왜곡된 역사만을 배우는 대대수 일본인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리고 지금도 그 역사왜곡을 멈추지 않고 있다.
 
양심적 일본 학자는 우리 역사 높이평가
 
우리 고대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있는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배달국의 영역이 분명히 기록돼 있다. 물론 우리 선조의 분포 상황도 기술하고 있다. 예컨대 우리 민족의 중국 분포도에 대해서 규원사화는 이렇게 적었다. “태고시기에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은 서남지방을 차지해 살았고,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은 북동지방에 많이 살았다. 유독 고시씨(高矢氏)의 후손만은 동남으로 옮겨가서 진한, 변한의 여러 겨레가 됐다” 이것이 삼한인데 모두 그 후손이다. 이 세 씨족의 후손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9파로 갈라졌다. 현이(玄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적이(赤夷), 견이(畎夷)=서이(徐夷), 회의(淮夷), 도이(島夷), 황이(黃夷), 풍이(風夷), 려이(黎夷) 또는 양이(陽夷)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본래 조상은 모두 같아서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이 내용에서 지역의 위치만 제외하고는 정확한 기술이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이 거주한 서남지방은 지금의 하북성(河北省), 산서성, 같은 남서부지방이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은 동북지방으로 동북만주와 발해만, 요동반도지역을 가리킨다.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이 거주한 동남쪽은 한반도와 중국의 동남부지방을 말한다. 중국25사(二十五史)와 국내외의 여러 역사문헌을 보면 배달국시대에 우리의 한민족인 구이(九夷=東夷인 구려(九藜)가 현재 중국 땅을 합친 동부아시아 거의 전 지역을 개척하고 차지해 살았다고 돼 있다. 아울러 동양문화의 창시자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증거가 배달국시대 글자 창제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녹서(鹿書) 또는 녹도문(鹿圖文), 복희(伏羲)의 용서(龍書), 치우의 화서(花書), 자부선생(紫府先生)의 우서(雨書) 등인 문자가 있었다. 단군 고조선시대에는 전서(篆書) 또는 진서(眞書)라는 문자와 BC 2181년에 을보록(乙普勒)이 지은 38자 정음이 있었는데, 우리가 이를 가림토(加臨土=고대 한글)라고 하는 것을 창제한 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문화민족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IQ가 세계제일은 우연이 아니다.
 

 

또한 부여시대에는 왕문(王文)이 전서(篆書)를 발전시켜 해서(楷書)를 만들었다. 이 원류(源流)는 모두 배달국시대부터 전래되는 문체인 것이다. 한자(漢字)도 그 지류다. 일본학자 가지마 노보루(鹿島 昇)는 ‘왜인흥망사’(倭人興亡史1, 2)와 ‘실크로드의 왜인(倭人’에서 “태백일사(太白逸史)는 다분히 이맥(李陌)의 사안(史眼)을 거친 조선중심의 아시아사라 할 터인데 내외의 문헌 51종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만큼 높이 평가돼야 할 책이며 우리들이 배울 것이 많이 있다.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를 저술한 1410년은 일본으로선 무로마치(室町) 시대다. 당시 전국시대가 돼 참담한 암흑시대로 들어갔지만 조선은 왕조의 발흥기(發興期)가 된다. 이맥(李陌)은 괴산으로 정배 가서 근신하던 중 고서를 섭렵해 일사(逸史)를 저술했다”고 했다.

 

 

이 같이 일본의 외국학자들도 고대사서와 환단고기(桓檀古記)가 연계된 연구를 통해 우리에게 많은 자료를 제시해 준다. 중국은 팔괘(八卦)를 창안한 복희씨(伏羲氏)를 비롯해 신농씨(神農氏), 수인씨(燧人氏)의 기록 등까지 변조하며 자기들 조상이라고 하지만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중국의 삼황오제를 비롯해 역사인물들은 거의 우리 배달민족의 자손들이다. 중국을 지배하고 통치한 중국대륙을 호령한 고대 제왕(帝王)들이 위대한 한민족(韓民族)이었음은 위의 사서들이 말해주고 있다. 역사는 바로 정확하게 제대로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
   
러시아 학자 유. 엠. 부틴과 중국 사학자의 기록들
 
러시아 학자로 우리 조선사를 깊이 연구한 유. 엠. 부틴은 그의 저서 ‘고조선’에서 “고조선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 60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이요 중국의 북부와 중부와 남부에 걸친 넓은 대륙에 분포해 정착하고 살았다. 이들은 일정한 공통점을 지닌 문화를 이루면서 동부 아시아 전 지역에 걸쳐 동방문화권을 형성했다. 중국문화와는 전혀 다른 독창적이고 독특하며 독자적인 문화를 수천 년 동안 계승 발전시켜온 민족이다”고 그 소명자료를 일일이 열거·고증(考證)하면서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인 역사자료를 근거로 “고조선에서는 이미 농업과 축산업, 직물업(織物業), 도기산업(陶器産業), 비금속(非金屬), 보석가공업(寶石加工業)의 야금술(冶金術)과 수송수단(輸送手段)인 수레와 선박의 제조가 각각 분업화되어 이루어 졌다고 단언 할 수 있다”고까지 했다.

 

 

고조선의 사회적 경제체제와 생산력에 관해서 상세히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역사 고사변(古事辯) 제7권 중편 삼황오제고(三皇五帝考)에 고대제왕(古代帝王) 등의 종적(蹤迹), 즉 드러난 형상과 흔적을 살펴봐도 “대다수의 제왕이 동방에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설파했다. 중국의 고대 인물들은 거의 동이족이기도 했다. 사기(史記)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와 서량지(徐亮之)의 ‘중국민족사’에서도 “정욱(정頊)은 동이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書經)에서도 이르기를 “제8제왕이 숙신(肅愼=조선) 나라에서 취해온 것이다”는 기록이 있다. 아울러 “황제는 백민(배달국)에서 태어났음으로 스스로 동이인(東夷人)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같이 고대 중국의 왕들은 동이족들이었다. 이는 필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중국의 양심있는 사가들이 말한 것이다.
 

 

중국의 임해상(林惠祥)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중국민족사’ 제5장 구여삼묘(九黎三苗)편에서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시대에...남쪽에 여(黎)와 묘(苗)가 살았다. 여(黎), 묘(苗)가 대대로 살던 곳이었다"고 했다. 또 정현(鄭玄)과 위소(韋昭)는 “삼묘(三苗)는 구여(九黎)의 후손들이다. 대저 상고시대에 강한(江漢)의 지역이 구여(九黎)의 영토였다. 여묘(黎苗)의 세력이 제하(諸夏)와 더불어 가장 강력했다. 치우(蚩尤)는 구여(九黎)의 천자(天子)였다. 이후로부터 마단림(馬端臨)과 정현(鄭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없었다. 삼묘(三苗)는 성을 강씨(姜氏)다”고 했다. 임해상(林惠祥)은 동이(東夷)는 삼대(三代)로부터 춘추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화하계(華夏系)와 접촉이 빈번하게 됐다. 또한 고서(古書)에서 이르기를 ”순임금은 동이의 사람이다. 또한 제환공(齊桓公)을 도와서 이적(夷狄)을 물리친 관중(管仲=齊나라 재상)도 래이(萊夷), 즉 동이의 사람이다.

 

 

지금에 이르러 고증한 바로는 은(殷)나라와 상(商)나라는 동이계통에 예속된 제후나 나라들이다. 그 후 진(秦)이 중원을 통일한 뒤에 동이나라가 비로서 흩어져서 민호(民戶)가 됐는데,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하기 이전 우리는 중원대륙의 80%를 지배한 것은 동이족이다”고 했다. 이처럼 중국학자들이 인정하고 역사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함으로 비로소 만리장성 밖의 란하(灤河)유역으로 영토가 축소되어 화하족에 밀렸는데, 때는 고조선의 말기로서 부여 등 열국시대로 변천하는 BC128~221년 경이었다. 임해상은 또 “진시황 이전의 역사는 황제(黃帝)의 고대사 또한 맥동(貊東), 즉 동이에 속한 역사다”라고 말하고 있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나라 강단파는 여전히 조선사편수회의 책만을 따르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 歷史’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출처 : 맹꽁이의 찬양
글쓴이 : 맹꽁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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