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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년 한번, 가장 의미있는 날 8·15에”… 4代제사 몰아지내는 독립운동 가문- 유원모 기자/ 동아일보 2019. 1.28

good해월 2019. 1. 28. 08:23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19]유림 명문 안동 임청각 종가
“공자 맹자는 독립후에 찾자”, 석주 이상룡 선생의 뜻 이어

22일 경북 안동시 임청각 사당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오른쪽 사진)의 현손인 이창수 씨가 설 차례와 제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안동=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8월 15일 오전 11시. 광복절에 부모님부터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4대의 기일 제사를 한꺼번에 지내는 집이 있다. 신문지 크기의 작은 상 4개를 모아놓고 과일 4개와 포, 국 등을 올리는 게 전부다. 그래도 조상을 기리고 존경하는 마음은 그 어느 집보다도 크고 깊다. 바로 유림 명문가이자 10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임청각(臨淸閣·보물 제182호)파 종가의 이야기다.

임청각 종가를 대표하는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구한말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99칸짜리 사대부 반가(班家)의 종손이었다. 이 집안은 조선 후기 한때 노비가 408명이나 됐을 정도의 대부호였다. 석주는 일제에 나라를 뺏긴 이듬해인 1911년,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떠난다. 독립운동에 투신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냈다.  

“400년간 이어져 온 가문의 재산을 모두 털어 서간도에서 경학사와 신흥무관학교를 짓고, 독립군을 육성하셨죠. 고조할아버지(석주)가 고향을 떠나시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으셨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공자와 맹자는 독립 후에 찾자’고 하셨다고 해요.” 22일 안동에서 만난 석주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 이창수 씨(54)가 말했다.

1년 내내 제사가 끊이지 않던 이 집안에서 1994년 새로운 전통이 생겼다. 당시 집안의 큰 어른이던 작은아버지가 “우리 집안의 전통은 제사가 부담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년 중 가장 의미 있는 날에 4대조까지 모든 제사를 모아 지내자”고 제안한 것이다. 만장일치로 광복절이 뽑혔고 매년 8월 15일이면 제사를 지낸다.

임청각 종가는 설 차례상도 간소하다. 이 씨는 “1744년 쓰인 집안의 제사 매뉴얼에는 후손들의 수고로움을 덜어주려는 내용이 강조돼 있다”며 “허리 디스크로 고생하는 아내를 위해 전은 사서 올린다”고 말했다. 

이 집안에서는 석주와 그의 동생, 아들, 손자, 손자며느리까지 총 10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됐다. 이들의 독립운동 기간을 합치면 300년이 넘는다.

안동=유원모 기자 onemore@donga.com 

“제사로 식구들 힘들게 하지 마라” 500년 종가의 가르침

             유원모 기자 , 임우선 기자  / 동아일보 2019-01-28


[새로 쓰는 우리 예절 新禮記(예기) 2019]<1>석주 이상룡 선생 종가의 제사
《 지난 한 해 독자 여러분의 큰 사랑을 받은 ‘새로 쓰는 우리 예절 신예기(新禮記)’ 시리즈가 올해 ‘신예기 2019’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신예기는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세대와 남녀, 개인 간 갈등을 낳는 일상의 예법을 재조명하고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새로운 예법을 제안하는 공론의 장입니다. ‘신예기 2019’ 첫 회로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독립운동가 석주 이상룡 선생 종가의 특별한 설 차례와 제사 풍경을 소개합니다. 》
  
지난해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가가례: 집집마다 다른 제례의 풍경’ 전시회에서 재현한 명재 윤증 종가의 간소한 제사상 차림. 아름지기 제공



22일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인 이창수 씨(54)와 함께 경북 안동시 고성 이씨 사당이 있는 임청각(臨淸閣·보물 182호)을 찾았다. 1519년 세워져 500년 전통을 간직한 임청각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기 전까지 부유한 유림 종가였다. 그래서 1년 내내 조상을 모시는 제사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임청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사당은 현재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나 감실(龕室·신주를 모시는 곳) 등 일반적인 제례(祭禮) 도구 하나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이 씨는 “고조할아버지(석주)가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떠나며 고향 땅에 신주를 묻었다”며 “지금은 신주 없이 사진만으로 조상을 모신다”고 말했다.

임청각에는 석주가 1911년 만주로 떠나기 직전 쓴 ‘거국음(去國吟)’이라는 시가 걸려 있다. ‘보배로운 우리 강산 삼천리, 조선 500년간 문화를 꽃피웠네. (중략) 고향 동산 근심하지 말거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다’라는 내용으로 구국을 위해 고향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조선 후기 임청각 종가의 분재기(分財記·가족이나 친척에게 나눠줄 재산을 기록한 문서)에는 노비만 무려 408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석주는 1911년 1월 “너희도 이제 독립군이다”라는 말과 함께 안동에서 처음으로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이들을 해방시켰다. 처분한 모든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쓰면서 제사는 자연스럽게 간소해졌다.

이 씨는 “독립운동 이전에도 임청각 종가의 제사상은 매우 간소했다”며 1744년 작성된 ‘고성 이씨 가제정식(家祭定式)’을 보여줬다. 집안의 제사 매뉴얼인 이 문서에는 ‘제사상은 간소하게 차릴 것’, ‘윤회봉사(형제간에 돌아가며 제사를 지내는 것)를 할 것’, ‘적서(嫡庶)의 차별 없이 모두 참여시킬 것’ 등 지금 봐도 혁신적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임청각은 아들이 없는 경우 외손이 제사를 지낸 전통도 있다. 이 씨의 20대조 6형제 중 다섯째인 ‘이고’라는 분은 자손이 딸 하나밖에 없었는데, 생을 마치고 사위인 서씨 집안에 재산을 물려줬고 이후 외손자가 제사를 지냈다. 이 씨는 “지금도 서씨 가문에서 외손봉사로 ‘이고’의 제사를 지낸다”며 “외가든 서자든 누가 제사를 지내든 각 집안의 예법인 ‘가가예문’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 씨는 또 “제사 때문에 식구들을 힘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야말로 임청각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라며 “제삿날에는 제 여동생들도 모두 모여 며느리들과 똑같이 일한다”고 말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 4대조의 제사를 모두 모아 지내는 임청각 종가는 낮 12시 제사를 마치면 가족들이 둘러앉아 비빔밥을 먹는 것으로 제사를 마친다.

이런 원칙은 설 차례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씨는 “제가 사는 서울의 아파트는 좁아 음식을 올릴 상을 제대로 펼 수도 없다”며 “가로 60cm, 세로 40cm 크기의 상 4개를 붙여 한꺼번에 차례를 지낸다. 차례 음식은 과일 4개랑 포, 떡국까지 합해 10개가 채 안 된다”고 전했다.

이 씨는 “지난해 추석 신예기 기사에서 퇴계 이황의 종가가 추석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는데 많은 안동 유림 종가들이 그렇다”며 “우리도 추석엔 차례 없이 처갓집에 가서 처가 식구들과 여행도 하며 가족애를 다진다”고 말했다.

안동=유원모 onemore@donga.com / 임우선 기자

명재 종가 신정 차례상엔 떡국-茶-과일뿐

                             임우선 기자  / 동아일보  2019-01-28    


조선 대표 성리학자인 윤증 후손들, “차례상 비용 3만원도 안들어”
기제사땐 과일-나물-생선 한토막, “제물보다 마음” 선조 유지 받들어


“설 차례상요? 우리 집안은 이미 신정에 차례를 지냈는데요.”
25일 조선시대 대표적 성리학자인 명재 윤증(1629∼1714) 종가의 차종손인 윤완식 씨에게 설 차례 계획을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다. 그는 “설 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며 “신정 차례상에는 과일과 차만 올린다”고 했다.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명재 종가가 설을 지내지 않는 데다 신정 차례상에 다과만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재는 왕에게서 우의정 등 높은 벼슬자리 부름을 받고도 관직에 나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학 양성에 힘쓴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 보니 살림은 늘 궁핍했다. 어려운 살림에도 제사를 지내야 할 후손들을 위해 명재의 유지(遺旨)는 분명했다.

‘제사를 간소하게 하라. 부녀자들의 수고가 크고 사치스러운 유밀과(약과)는 올리지 말라. 기름을 쓰는 전도 올리지 말라.’ 집안의 제사상 크기는 가로 99cm, 세로 68cm로 정해져 있어 음식을 많이 올리고 싶어도 올릴 수 없다고 한다. 윤 씨는 “우리 종가의 특징은 여성의 수고를 덜어주고 제물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말했다.


명재 종가의 제사상에 올라가는 과실은 대추와 밤, 감 등 딱 세 가지다. 대(代)의 이어짐을 의미하는 뿌리와 줄기, 잎을 활용한 3색 나물을 올리는데, 이조차 따로따로 담지 않고 한 그릇에 담는다. 조기 역시 통으로 올리지 않고 한 토막만 올린다고 윤 씨는 전했다. 


설 차례상은 기일제(조상이 돌아가신 기일에 지내는 제사)상보다 더 간소하다. “차례는 차(茶)를 올린다고 해서 차례예요. 차례상에는 떡국과 과실 세 가지, 식혜, 녹차 정도만 올려요.” 윤 씨는 “만약 조상이 커피를 좋아하셨다면 커피를 타서 올릴 수도 있을 것”이라며 “차례상 비용은 3만 원이 채 안 든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교육과장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통 차례상은 명재 종가처럼 간소했다. 김 과장은 “차례에 대해 조상들이 남긴 규칙은 ‘과일과 제철음식 하나’가 전부”라며 “설 차례 때 기일제를 함께 드린다면 모를까 기일제를 따로 지내면서 차례상을 제사상처럼 차리는 것은 과하다”고 말했다. 차례상은 명절 때 자손들만 맛있는 음식을 먹기 죄송해 설이면 떡국, 추석이면 송편, 단오면 쑥떡 등을 한 그릇 담아 차와 함께 조상에게 올린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명재 종가처럼 설 대신 신정을 쇠는 건 문제가 없을까. 명재 종가가 신정을 쇠게 된 것은 윤 씨의 증조부인 윤하중 선생의 결정 때문이었다. 천문학자인 윤하중 선생은 1938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 ‘역서에 관한 고서란 고서는 모두 읽은 역학계의 거성(巨星)’으로 소개된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윤 씨는 “천문학을 공부한 증조부는 양력이 음력보다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집안의 제사와 생일을 모두 양력에 맞춰 지내도록 했다”고 말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안승준 고문서연구실장은 “차례든 제사든 전통은 시대와 집안에 따라 얼마든지 변형할 수 있다”며 “모든 의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고 강조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출처 : 걸으며 노래부르자
글쓴이 : august le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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