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만 둘 있는 3대 독자(27세)로, 집에서는 1년에 차례와 제사를 4번씩 지냈지만 한 번도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땐 숙모와 형수님만 부엌을 드나들며 음식을 만들고 삼촌들은 거실에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어머니는 맞벌이를 하면서도 20년 넘게 수많은 차례‧제사상을 차려오셨다. 그러던 어머니가 지난해 "더 이상 제사상을 차리고 싶지 않다"며 ‘명절 파업’을 선언하셨다. 차례상도 차릴 겸, 그간 어머니의 고충을 이해하고 싶어 올해 명절 음식은 직접 한 번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머니의 '명절 파업' 선언, 시작된 도전
가까운 안양중앙시장으로 나섰다. 시장은 설 명절을 앞두고 붐볐지만, 대부분 중장년층 여성들이었고 기자와 같은 젊은 남성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얇게 썬 쇠고기, 손질된 동태, 다짐육 등을 샀다. 황태포와 깐 밤, 배도 담았다. 조기구이를 할 생 조기도 처음 사봤다. 재료를 다 사니 양손 가득 10개가 넘는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들고나올걸 싶었다. 족히 10kg은 되는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집까지 40분 동안 들고 갈 자신이 없어 결국 택시를 탔다. 장 보는데 90분, 비용은 7만2300원이 들었다.
7시간 서서 요리 6개 완성…기름 냄새 잔뜩, 온몸이 뻐근
재료는 샀는데 어디서부터 요리를 시작할지 막막했다. 어머니가 “재료 손질 먼저 하고, 고기 양념도 미리 해둬야 한다”고 귀띔해주셨다.
오후 3시, 시금치·도라지·고사리 나물부터 요리를 시작했다. 한 봉지 그득하던 시금치는 데치니 한 그릇 분량으로 줄어들었다. 사 온 고사리가 이미 데쳐져 있길래 들기름에 5분 정도 볶고 냈더니, 어머니가 “간장, 물을 넣고 오래 볶아야 된다”며 고개를 저으셨다. 7분 정도 더 볶자 그제서야 부드럽게 나물이 완성됐다.
길게 잘린 도라지를 그냥 볶으려 하자 어머니가 “그렇게 길게 그대로 볶으면 어떡하냐”며 아예 식칼을 뺏어서 직접 도라지를 길이에 맞춰 자르셨다. 도라지는 식용유와 다진마늘, 다진파를 넣고 볶아냈는데, 소금물에 담가 쓴맛을 빼는 과정을 빠뜨리는 바람에 약간 쓴맛이 남았다.
쉬울 줄 알았던 쇠고기산적 양념도 쉽지만은 않았다. 어머니가 알려준 대로 간장, 물엿, 참깨, 마늘 등을 섞어 내일 구울 고기를 미리 재뒀다. 그릇이 작아 얇게 편 쇠고기 2개만 쟀는데, 어머니께서 “제사상에는 홀수로 음식 올리는 게 기본”이라며 타박을 하셔서 하나를 더 쟀다. 동그랑땡, 두부부침은 비교적 수월하게 끝났다. 요리하는 내내 할머니는 ‘뭔가 못마땅한 눈치로’ 부엌을 서성이셨다.
오후 10시, 일단 6개 요리를 완성했다. 7시간이 걸렸다. 내내 서서 일한 탓에 다리가 무겁고 온몸이 뻐근했다. 기름 냄새가 벌써 옷에 뱄다. 할머니는 “네가 하루종일 계속 일했으니 얼마나 팔이 아프겠냐” 걱정하셨다. 야근이 끝나고 늦게 들어온 둘째누나는 부엌을 보더니 “왜 하지도 않던 짓을 하냐”며 의아해했다.
다음날, 오전 8시부터 남은 요리를 마저 하기 시작했다. 동태전, 쇠고기 산적, 떡국을 우선 해치웠다. 동태전은 계란물이 잘 묻지 않아 뒤집으면서 계란옷이 자꾸 벗겨졌다. 지켜보던 어머니는 “젓가락 말고 숟가락으로 계란물을 떠서 같이 팬에 올리면 낫다”고 한마디 거드셨다.
마지막으로 조기구이를 준비했다. 태어나서 처음 생선을 손질해봤다. 기자가 칼날로 비늘을 벗겨내려고 하자 어머니께서 화들짝 놀라시며 “칼등으로 해야 한다”고 알려주셨다. 조기는 내장을 빼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비늘을 긁어내고, 지느러미를 가위로 자른 뒤 밀가루를 살짝 묻혀 기름에 노릇하게 구웠다.
20분 만에 끝난 차례, 준비는 12시간
차례는 20분 만에 끝났다. 다시 앞치마를 둘렀다. 요리에 쓴 그릇과 제기들까지, 개수대는 꽉 찼고, 개수대 옆 싱크대에도 한가득 설거짓감이 쌓였다. 제기를 닦고 챙겨 넣는 데에도 40분이 넘게 걸렸다. 부엌 정리까지 끝내니 오전 11시 17분이었다. 장보기부터 요리, 설거지까지 총 12시간이 걸렸다.
어머니는 “조상님이 손주가 차린 차례상 받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없을 거다”고 칭찬하시면서도 “그동안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겠냐”고 농담처럼 말씀하셨다. 가족 단체 대화방에서 사진을 본 첫째누나는 “오 웬일이래~ 잘 차렸다”고 말해줬다.
첫째누나는 그동안 어머니의 일을 가장 많이 도왔던 사람이다. ‘처음 한 것 치고는 잘했다’는 칭찬을 들었지만, 뿌듯함보다는 피곤함이 더 컸다. 가족들이 옆에서 도와주며 딱 한 번 차린 차례상이지만, 이틀을 쓴 준비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어머니의 ‘명절 파업’은 이유가 있었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